ep.후쿠오카
항구에 내렸을 때, 나는 꽤 많이 지쳐 있었다.
사람에 지치고, 일상에 지치고, 기대 없이 떠나온 여행이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보기보다는
그저 낯선 공기 속에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후쿠오카의 공기는 조용했고,
바람은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속도로 스쳤다.
하늘은 구름이 낮게 깔린 회색빛이었고,
그 흐림은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느낌.
그 안에 나는 처음으로, 마음 놓고 멈춰도 괜찮다고 느꼈다.
하카타역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지도도 열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없다는 건 이상한 해방감을 줬다.
이 도시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도 상관없다는 느낌.
며칠 전까지는 일정을 밀도 있게 짜야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인증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걷는 걸로 충분했다.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허락한 방황이었다.
카메라는 가방 안에서 조용했다.
찍지 않는 여행은 처음이었지만,
그게 생각보다 괜찮았다.
기억은 사진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하고,
사진보다 더 솔직한 장면들은
렌즈가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 있었으니까.
프레임 안에 넣지 않은 풍경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될 때가 있다.
그날의 빛, 바람의 결, 거리의 온도까지.
카메라는 쉬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 있었다.
오호리 공원까지 걷다가,
햇살이 드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커피도 없이, 이어폰도 없이,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은 천천히 비워졌고,
몸의 긴장도 조금씩 풀어졌다.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아이의 웃음, 자전거 체인 소리 같은 것들.
그 모든 사소한 진동들이
이상하게도 나를 위로했다.
정지한 풍경 안에서
나는 드물게 가벼웠다.
가야 할 곳도,
채워야 할 일정도 없는 하루.
그 하루가 내겐 오랜만의 숨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회복되는
이상한 평온.
후쿠오카의 낮은 하늘 아래,
나는 오래전 잊고 있던 '걷는 법'을 되찾았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걷기가 아니라,
생각을 천천히 흘려보내기 위한 걷기.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는,
그저 나 자신의 호흡에 맞춘 걷기.
길 위에서 바뀌는 건 풍경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이었다.
그 시작이, 이 여행의 전부였다.
그리고 아마도, 나를 다시 꺼내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