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언가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하다. 나는 마치 죄인처럼 엉거주춤 대답한다.
“뭐, 책도 읽고…”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끝을 낚아챈다.
“허허, 야아 니는 참~ 팔자 좋다야…”
팔자 좋다? 팔자 좋다, 로 시작되는 말은 영 듣기가 거북하다. 스피커음으로 돌린 폰을 소파 위로 던져놓는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를 귀로만 감내하기가 버거워서다. 어휘 하나하나의 뉘앙스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천하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나란 거다. 이건 아닌데, 책을 읽는 것도 나에겐 일종의 일인데 왜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몰고 가는 거지? 내가 하는 일쯤은 하찮게 보고 싶었던 건가. 아님 애당초 하찮게 보고 있었던 건가?
소속돼 있던 문인협회에서 빠져나온 지 오래됐다. 수필 소모임에서도 빠져나오고 나니 그나마 꾸역꾸역 쓰던 계간지 연재도 중단됐다. 혼자 글을 써야지 마음먹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마 코로나 시즌이 시작될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은 써서 뭐하려는 건가에 관한 회의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여전히 슬럼프는 건너는 중이다. 하필 이때 전화가 올게 뭔가. 유명한 작가였다면, 책을 읽고 쓰는 일이 무용하다 여겼을까. 어찌 책을 읽는 일을 팔자로 비하하는 건가. 나이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독서지도 및 논술 그룹지도를 십여 년 넘게 했다. 열정적으로 했다. 책을 읽는 일은 내게 분명 일이었다. 책을 읽고 신문을 읽어야 수업을 할 수 있었고 그게 일이고 전부였던 때였다.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어도 읽는 것이 일이 되니 버겁고 힘들었다. 그냥 편안하게 읽고 쓰고 싶었다. 결과물을 내기 위한, 사고를 위한 사고가 아닌 자유로운 감상 포인트를 착안한 글 읽기와 쓰기가 간절해졌다. 수업을 위한 책 읽기와 순수 글을 쓰기 위한 책 읽기는 달랐다. 그때 글쓰기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닌 형식적인 글쓰기, 수업을 위한 글쓰기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좋으면서도 힘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에 어찌할 바를 모를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다음 수업을 이끌기 위한 주제를 정하고 매일의 이슈와 문학작품 속 사건과 배경, 인물의 성격과 생각을 확장시켜 연결 지을 수 있는 밑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늘 힘겹고 벅찼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밤늦도록 그 작업을 했고, 뒷날 아침 조간신문을 펼쳐 읽고 최종 수업 준비를 마무리 짓는 것은 매일 매주 반복됐다. 힘들면서도 좋았던 시기였다. 그때 그들은 나의 책 읽기에 ‘팔자 좋구나’ 말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내로라하는 책이 없어서? 결과물이 없는 상황은 겉멋쯤으로 치부되는 건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나도 얼마만큼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증거였다.
수필집을 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자 리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중후반의 취준생쯤으로 보였다. 기업의 인적성 책도 토익책도 자기 계발서도 아닌 수필집을 통해 지쳐있는 현실에 쉼이 된 책이었다고. 저자의 삶을 통해 감성이 말랑말랑해졌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자기 계발서도 아니고 실생활의 도움도 아닌 그저 일상 이야기를 끼적이는 글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을 조금 희석시켜주었던 기억이다.
그즈음 내가 만난 위로의 글귀는 김화영 선생의 <행복의 충격> 서문이었다. ‘교양이나 지식이나 견문을 넓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책은 또한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여행안내에도 기여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문장이었고, 김화영 선생의 행복의 충격은 나의 감성과 일직선상에 있다는 쾌감이었다. 김화영 선생의 글과 견줄 수 없는 글이지만 내 글 또한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것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기껏 내 행복에 취한 글이었기에 더 그랬다.
도대체 왜 글쓰기를 하려는 건지, 글은 써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매일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감정의 높낮이를 서성이는 나를 보는 일은 아프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의 갈등을 일삼다가 다시 또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럴 때마다 좋은 문장을 가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지는 문장 속을 걷고 싶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묻는 모모의 엉뚱한 질문처럼 ‘사람은 문장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고 묻고 싶어진다. 문장이 되지 않으면, 문장이 없이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끈질기게 사로잡힐 때는 ‘나에게 기억력을 주신 하나님께 매일 감사하느라고 웃고 있지, 모모야,’ 말한 하밀 할아버지처럼 나도 그렇게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그는 알까.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에 격렬하게 반하는 마음을 그는 알까.
살아있는 감성의 낱알을 무용함으로 단속하고, ‘니는 참 팔자 좋구나,’ 로 매듭 하는 사고에 ‘너와 나는 다르니까’로 마무리 짓는다. 그는 <프레드릭>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햇살을 모으고 색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으는 들쥐 한 마리, 프레드릭의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니까. ‘에코백은 내가 모르는 마리코의 시간을 알고 있다.’**는 문장의 행간을 보고 밑줄을 긋는 이유도 절대로 모를 테니까.
설령 글을 읽고 쓰는 일이 무용한 일일지라도 그럼에도 글을 통해 얻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 내가 느끼는 만족감과 충만감을 그는 맛볼 수 없을 거라는 것. 사소함중에도 영혼을 충족시키는 그 무엇을 가지고 산다는 것에 무한 감사하기로 한다.
* 장 그르니에 <섬>에 붙인 김화영 선생의 서문 인용
**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문장, 주인공 사카니시가 좋아하는 여자 마리코가 준 에코백을 보며 생각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