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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Sep 21. 2021

지금 이 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장 그르니에, 공의 매혹)





 이른 저녁을 먹고 공원 산책에 나섰다. 다산신도시 새로 조성된 공원을 가려면 건너편 사거리 신호등을 지나야 한다.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건널목 앞에서 무심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ㅡ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희디흰 구름을 보는 것은 가슴에도 구름 한 점 흘러든다는 거다. 말할 수 없이 설렌다. 무념 무의식의 순간이다. 새벽은 더 좋다. 삽상한 빛과 삽상한 바람, 그 이끌림에 눈을 뜬다. 새벽이 주는 기운을 놓치고 싶지 않아 벌떡 일어난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전부이지만 하늘과 나무와 숲과 바람과 햇살은 무념의 상태로 이끈다. 천연의 시간이다. 그저 몇 시간을 물끄러미 하늘만 내다볼 때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 내가 낮아지고 작아지는 시간이다.ㅡ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다 무심히 고개 돌린 오른쪽 하늘, 거기 둥실 흰 달이 떠 있다. 신축 아파트가 건너편에 생기고, 구도로가 사라진 새로 난 도로는 등선을 이루고 있다. 그 오르막 등선 위에 달이 떴다. 오로지 그 길 만을 비추기 위해 뜬 달처럼 등선은 달빛으로 교교하다.

 달리던 차들은 보았을까. 그 길 중앙을 오롯이 비추는 혼을 사로잡는 달빛의 정령을. 사로잡는다, 는 말이 옳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를 이끄는 그 순간의 감흥은 사로잡는다, 는 표현밖에 할 도리가 없다. 얼른 폰을 꺼낸다. 줌을 움직여 사진을 찍는다. 사거리 이쪽저쪽 신호등, 그리고 전깃줄과 줄 사이에 그림처럼 걸려있는 거대한 흰 달에 시선을 꽂고 구도와 수평을 조정한다. 거리와 등선은 온통 하얗고 붉다. 이 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는 현재에 감사한다. 얻었다는 안도와 가졌다는 흥분이다. 감성을 아우르는 내적 고요로 이끌기도 한다. 달빛을 이은 등선은 특별하다. 전깃줄도 특별하다. 그 순간 특별하지 않은 것은 없다. 나도 특별하다.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구도라고. 각도이고 배경이라고. 완벽하다고. 생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문장이 갖는 소리는 맑게 울린다는데 나는 적확한 단어나 문장을 배열할 수 없어 안타깝다. 비와 바람과 햇볕이 꽃에 작용하듯이 이 순간 내게도 문장에 작용하는 그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신호등이 바뀌고 급하게 건넌다. 다음 장면을 기대했다. 건너편 달빛은 더 이상 같은 달빛이 아니다. 순간은 오직 그뿐. 여기 나는 이곳의 달빛에 젖고 저기 저곳의 그는 그곳의 달빛에 젖는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어디선가 꽃이 진다. 나는 밖에 있고 그는 에 있다.


 현재는 영원할 수 없는 것. 순간은 오직 그 순간뿐이라는 것, 달빛은 같은 달빛이지만 같은 느낌은 없다는 것. 그 느낌과 구도와 배경과 각도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순간은 찰나라는 것. 찰나는 운명을 바꾼다는 것. 그래서 순간은 소중하다는 것.





  김화영 선생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읽었다. 40년 만에 재번역한 장 그르니에의 ‘섬’이 작년에 출간되었고 출간 당시의 인터뷰인 듯했다.  

 “아무것도 안 할 때가 제일 행복하죠.(웃음) 그냥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때, 세상이 내 속으로 흘러드는 것 같을 때…. 그러다 그 생각이 원고지로 옮겨질 때가 좋고, 너무 심심하면 번역도 해요.” 그가 생각하는 번역 일의 좋은 점은 딴짓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존경하는 작가의 말이 나의 생각과 비슷하다니, 세상이 내 속으로 흘러드는 것 같을 때… 그러다 그 생각이 원고지로 옮겨질 때가 나에게도 자주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의 물음 앞에 선다. 고질병이 도지듯 나를 향해 다그치고 있다. 어떠한 글이 좋은 글이고 어떤 글이 나쁜 글인지 그 자체의 물음에 반기도 든다. 그 좋고 나쁨 사이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한 줄 글도 쓸 수 없을 때 슬며시 들고 일어서는 나를 위한 나만의 위로 한 마디는 이랬다. 그래 좋은 글이 어디 있으며 나쁜 글이 어디 있느냐고?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걸로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이 문장을 읽으며 누군가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이런 억지 위로라도 지금 나에겐 간절하게 필요하니까. 써야 살아 있는 것 같고 읽어야 나의 본분을 다한 것 같다. 이 두 가지를 놓치고 사는 인생은 내가 아닌 또 다른 타인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좌절하고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말이 섬 같아요. 한 문장이 섬이고 그 사이 바다가 있어요. 말하는 것을 통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말하는, 그런 책이에요.” 가령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공의 매혹) 이런 그르니에를 두고 김 교수는 ‘견고한 통나무나 대리석을 더 이상 깎을 수 없을 때까지 깎아 내어 진면목을 찾아내는 조각가’라고 평한다.


 “스토리뿐 아니라 글 쓰는 방식, 전체 구조, 동원된 문장의 배열 방식이 곧 문학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대입시험 때문에 모든 걸 요약해 놨는데, 요약본을 봤다고 해서 ‘마담 보바리’를 읽은 게 아니잖아요.” 스토리를 꿰고 나면 끝나는 문학이 아닌, 4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새로운 책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문학이다.

 그의 감성 끝자락 어디쯤 붙들고픈 욕심에 ‘섬’에 붙인 서문을 다시 찾아 읽는다. 번역가 평론가의 감성이 아닌 시인의 감성이 역력한 서문을 읽고 감동했던 순간을 다시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문득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無),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 장 그르니에 ‘섬’ 김화영 서문 <글의 침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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