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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an 09. 2019

얼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그녀는 예뻤어.     


 3월이었나. 강변역으로 향하는 15번 버스에 몸을 실었어. 몇 정거장 지나자 사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올라왔어. 스키니 바지에 철 지난 검정 정장 코트를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데도 촌스럽지가 않았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가늘고 흰 목덜미며 창밖을 응시하는 이지적인 눈빛 너머 희고 고운 쓸쓸함까지도.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할까.      


 도리언 그레이는 완벽하게 잘생긴 청년이었지. 화가는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지.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조각 같은 외모를 발견한 도리언은 그림처럼 빛나는 젊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주겠다는 허황한 소원을 빌게 돼. 그의 소원대로 외모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빛나는 젊음을 유지하지만 대신 그림 속 자신은 그의 타락의 흔적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추하게 늙어가지.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뭘까? 평생 함께해온 아집과 편견과 관념이 함께 늙어간다는 의미도 있겠지? 어떻게 살아야 잘 늙을 수 있을까. 요즘 나의 화두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가 관건이야. 어차피 주름살이 생기고 나이를 먹어갈 것인데 좀 더 고상하고 좀 더 품위 있고 가장 자연스럽게 늙고 싶다는 것은 나만의 욕심은 아니겠지?     

 타락한 도리언, 어쩌다가 초상화가 그의 인생의 짐을 대신 져 주었는지 말이야. 늙고 추악하게 일그러진 초상화를 바라보며 그의 양심은 괴로워했어. 자신을 망친 건 화가가 그린 그림 때문이라 원망까지 하지. 그가 바라는 것은 새로운 인생이었어. 흉측한 그림이 말해주듯 그의 타락은 너무 깊었지. 그의 인생에서 죄를 범할 때마다 확실하고 즉각적인 처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버스 안의 그녀는 모두가 말하는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얇게 펴 바른 비비크림의 흔적만으로도 맑아서 고왔고,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졌어. 처음 보는 그녀에게서 품격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겠지만 결곡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였지. 그녀의 느낌 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가 않아.      

 나는 마치 관상쟁이라도 된 듯 여러 주위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봤어.


 A는 그야말로 퀸카였어. 한마디로 말하면 모두의 부러움을 산 멋쟁이에다 미인이었고 호탕한 성격이었지. 그녀를 이십여 년 만에 만났어. 명품 가방에 고가 옷을 걸쳤지만, 예전과는 달리 추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어. 왜 그랬을까. 참 조심스러운 표현인데 얼굴에는 시술의 흔적도 보이고 최선을 다해 단장하고 나온 흔적은 역력한데 어쩐지 그녀의 얼굴에서 싼 티가 묻어났다면 이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걸까. 그렇다고 그의 삶이 타락과 맞물린 삶이라고 추호도 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상위그룹의 직업군과 환경을 고수하고 있으며 나름의 개성 있게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야.  

 B는 조용했어. 어디서나 있는 듯 없는듯하여 그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고 항상 구석진 자리에서 찾을 수 있었지. 그는 말없이 자신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줄 아는 책임감도 있었어.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거야. 은은한 세련미가 주위를 밝히고 있다고 하면 그 느낌 알겠니? 온화한 성품에 조용조용한 미소가 모두를 편하게 만들거든. 그다지 멋을 부린 것 같지 않고 대충 걸치고 나온 것 같은데 멋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지성미가 넘친다고 찬사를 보내지. ‘드레지다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해. 


 눈에 보이는 둘을 멀찌감치 비교해보면 그들의 삶은 다를 바가 없어. A의 호탕한 웃음 너머의 차가움, B의 조용한 미소 너머의 이지적인 따뜻함, 약간의 차이라 하면 성격에서 오는 그 정도의 차이일까. 철저한 자기 관리며 둘에게서 느끼는 삶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데 정작 그 둘은 너무 다르다는 거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 나는 어떻게 보일까. 그들은 내 모습에서 무엇을 볼까. 무엇을 느낄까. 누가 나를 보고 그러더라. 촌티를 못 벗었다. 고집스러움, 해맑은 눈웃음 뒤에 서려있는 뭔지 모를 애잔함, 핏기 없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연약함, 미소 짓는 입 꼬리 뒤에 숨은 묘한 상념의 흔적이 보인다고. 참 자세하게도 묘사했지. 그런데 그것들이 무엇을 뜻할까. 짐작만 할 뿐 잘 모르겠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텐데 나는 어찌 살고 있나. 잘 살아왔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잘 늙어가고 있는 것인가.     

 

  완벽하게 잘생긴 귀족 청년 도리언이 외모만큼 아름답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한때 퀸카로 불렸던 A가 예쁜 겉모습만 꾸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가꿨다면 어땠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은, 살아온 나날들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는 중년의 나이, ‘그녀는 느낌이 있어’ 누군가에게 그런 찬사를 듣는다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겠지?   

   


 #오스카와일드 #도리언그레이의초상 #얼굴 #지성 #품격 #귀족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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