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했던 딸이 근무 중 집으로 돌아왔다. 기침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코로나19 확진자랑 동선이 같아 2주간 격리됐던 터 격리가 해제되고 며칠 출근을 했다.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대구와 인접지역에 근무지가 있다는 것만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그때, 이제는 기침을 했다고 가래가 있다고 사무실에서 퇴출(?)되어 집으로 온 것이다. 기침이 멎고 가래가 떨어져야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열도 없는데 열을 재야 하고, 단지 잔기침 때문에 의심을 받고 검사를 해야 한다. 더욱이 무증상 확진자가 증가한다는 뉴스는 더 불안을 유발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까지 콧물이 나오고 두통이 심했다. 단순 감기였음에도 코로나19라는 사회적 환경은 그간의 외출 동선까지 파악하게 했다. 불안 속의 며칠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쯤에서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 소설은 한 익명의 도시에 ‘백색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 아무런 이유 없이 눈이 멀었다고 하자, 그 공포감이 어떨지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이 소설은 자동차를 운전하다 눈이 멀게 된 남자를 시작으로 그 남자를 집까지 데려다 준사람, 그들을 진료했던 안과 의사,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사팔뜨기 소년, 안대를 한 노인, 눈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지만 눈이 먼 척을 했어야만 했던 안과 의사의 아내 등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눈먼 자들이 주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정부 당국은 눈먼 자들을 모아 강제로 수용해놓고 무장한 군인들에게 감시할 것을 명령하며, 탈출하려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고 말한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눈먼 자들 사이에 식량 약탈, 강간 등 온갖 범죄가 만연한다. 화재가 발생해 불길에 휩싸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수용소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찬, 썩은 시체와 쓰레기로 가득한 폐허가 된 도시를 목격하게 된다. 이 악몽의 유일한 목격자는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눈이 먼 것처럼 위장했던 안과 의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황량한 도시로 탈출하기까지 자신과 함께 맨 처음 수용소로 들어갔던 눈먼 자들을 인도한다. 폭력이 난무하고 이기주의가 만연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를 책임감으로 받아들이며, 희생과 헌신을 한다. 눈먼 자들이 서로 진정한 인간미를 느끼며 타인과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눈이 멀었던 사람을 시작으로 차례로 시력을 회복한다. 하지만 그들이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은 인간성이 말살되고 국가는 존재 의미를 상실한 폐허더미로 변해버린 뒤였다.
소설은 모든 것을 목격한 의사 아내의 고백으로 끝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은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단순히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작품 속의 인간들은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자신의 인간성조차 잃어버린 장님들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치자, 그건 재난 앞에 무용지물일 뿐이다. 갖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면 그 삶은 얼마나 허무할까. 인간은 늘 그러한 우를 범하고 산다. 이 소설이 날카롭게 풍자하는 이면이기도 하다. 불가항력의 재난은 인간성의 다양한 국면을 드러내는 우화적 장치로 활용된다. 남편을 돕기 위해 실명을 가장하고 함께 수용소에 격리된 안과 의사의 아내는 익명의 도시가 아수라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체험적으로 관찰할 뿐 아니라, 모순과 불의에 맞서 스스로의 존귀함을 공격적으로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전처럼 분명히 보입니까? 백색의 흔적은 없나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은데요? 이건 대단한 거죠?”
과거, 가졌고 누렸던 그 풍요로웠던 날들을 세어본다. 눈이 멀어보고서야 비로소 잘 보이는 것에 대한 대단함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꽃이 피었는데도 봄이 봄 같지 않은, 신과학문명이 세상을 지배할 것 같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맥을 못 추는, 세상은 감염병의 불안 속에 격리되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한다는 사실도 불행한 일이다. 사람이 모인다는 이유로 꽃밭을 갈아엎고 벚꽃길이 통제되고 미술관이 닫히고 공연이 취소되고 학교가 문을 닫고 종교 집회가 중단되고 직장인은 재택근무에 들어가고 관광버스와 국제선 비행기가 제구실을 못하는 시대. 이전에 당연하게 느꼈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재난을 통해 깨달아간다. 이러다 세상이 멈추어버릴 것 같은 불안이 가중된다.
소유의 목적은 욕심에서부터 출발한다. 지나친 욕심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먼 자’로 만들어 버린다.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가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그럼에도 견뎌내며 자신과 남편 그리고 주변의 삶을 인도했듯이, 우리도 ‘존엄’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안타까이 이 시대를 건너야 하지 않을까. 돈도 명예도 실력도 과학문명도 제압당할 수밖에 없는 감염 바이러스 앞에 우리가 욕심을 앞세워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까운 봄날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틈바구니에서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걸어놓은 덫에 걸려버린 <침묵의 봄>을 염려하는 것은 괜한 짓이 아닌 것 같다. 과도한 항생제 투여와 과도한 살충제 살포로 내성이 생겨버린 자연과 환경은 이상기온으로 몸부림치고 그로 인한 자연재해가 우리에게 도래해버린 것은 아닌지….
새순이 돋는 시간, 꽃이 피는 시간, 나무가 자라는 시간, 햇살이 지나가는 시간, 아이가 자라는 시간, 내가 여기까지 온 시간…. 이미 가졌던 것들의 시간을 되짚어 펼쳐본다. 그 정직한 시간 앞에 머리 숙이며 겸허히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는 삶은 어떤가? 시력을 회복한 후에 보니 함께 지냈던 사람이 보잘것없는 주름투성이의 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계속 함께 지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처럼. ‘보고 있다’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서로 베풀고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눈뜬 자들의 도시’를 위해 좀 더 주의 깊은 시선을 일상에 돌리도록 작가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코로나19도 인간에게 경고하는 신의 메시지가 아닐까. 보이는 일상만이 아닌 다시 새로이 눈을 뜨고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라고. 그러하기에 더 많은 것을 내려놓고 편안해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