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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an 08. 2019

나는 누구인가

김숨 '뿌리 이야기'를 읽고


 뿌리의 표정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올 때,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 있는가.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복숭아나무뿌리가 땅 속에서 수분을 빨아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지었을 표정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렇구나, 뿌리에게도 표정이란 게 있겠구나! 꽃이 필 때는 이런 표정, 꽃이 질 때는 이런 표정을 지었겠지? 가지가 흔들릴 때, 열매가 익어갈 때 뿌리는 이러한 표정으로 서 있었겠지? 뿌리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소설 속 인물은 인간보다 나무뿌리의 표정이 풍부한 것 같다고 말을 한다. 나무의 표정을 보라고 했던 것인데, 정작 그러고 나면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표정이다. 나무뿌리의 표정에서 사람의 표정으로 연계되는 그 힘이 작가의 능력이고 힘인 듯하다. 


 복숭아나무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보라니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풍부하고 절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나무뿌리가 아닐까. 저 복숭아나무 뿌리가 땅 속에서 수분을 빨아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지었을 표정을 상상해봐. 줄기와 가지들이 휘청 흔들릴 때 지었을 표정을, 진분홍 꽃이 다투듯 피어날 때 뿌리가 지었을 표정을. 원뿌리가 새로 곁뿌리를 칠 때마다, 곁뿌리에서 실뿌리가 한 가닥 한 가닥 돋을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졌을 뿌리의 표정을 상상해봐.      

 라르고의 생명력으로 땅 속을 장악해갔을 뿌리를. 관조된 시간이 느껴지지 않아? 뿌리가 땅 속에서 일보 일보.... 극한의 기호를 필요로 할 만큼 미분된 시간을 기록하듯 내닫는 동안 땅 위 지상으로 뻗은 가지들에는 잎과 꽃이 수없이 피었다지고 열매가 맺혔겠지. 문득문득 새들이 날아들었을 거야. 사십육억 년이나 삼십이억 년 우주를 떠돌던 운석이 지구로 떨어지듯 새들이 날아들어. 둥지를 틀고 알을 낳기도 했겠지.     



 엄마의 부음을 듣는 순간, 나는 거울 앞에 있었다. 외출을 하려고 화장을 하던 중 엄마의 부음을 들었을 때 내가 지었던 표정을 지울 수 없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섭고도 두려운 절망의 표정이 내 미간에 새겨지는 그 찰나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영혼이 풍덩 빠져나가는듯한 허망함, 온몸을 엄습하는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 순간 나는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절망과 슬픔의 표정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았다. 나의 뿌리가 뽑히는 순간이었다. 나의 영혼이 풍덩, 몸에서 빠져나와 허깨비가 되는, 움켜쥐었던 엄마와의 나의 연결고리가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오열했다.


 뿌리를 오브제로 작업을 하는 작중 화자는 나무의 뿌리를 찾아다닌다. 단풍나무 뿌리에서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사철나무 등등 갈아엎는 포도밭이나 산을 깎고 파헤치는 도로 공사 현장이나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나서 나무들 뿌리가 뽑히는 곳이나 철거민촌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지지만 그가 나무뿌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원을 찾아 나서는 내적 심리가 그의 삶을 뿌리에 집착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에 태풍 경보가 내리고, 광풍이 불어 가지가 사납게 흔들릴 때, 정작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나무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까? 나무가 감정을 느끼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다가도 가만히 따져보면 제법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가 오브제로 선택하는 뿌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천재지변의 화를 입었거나,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살던 곳에서 내쫓긴 철거민들처럼 하루아침에 굴삭기에 파헤쳐진 뿌리라는 것이었다. 


 “이식할 때 나무가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인간이 전혀 못하는 것 같아. 뿌리가 들릴 때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각 못 하는 걸까.”     

 같은 상상들. 뿌리의 표정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고, 냄새와 촉감에 의존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애초에 뿌리 이야기는 이와 같은 발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창작되었고, 소설은 그러한 상상력의 여지를 허용하는 독자에게만 더욱 풍성한 뿌리의 표정을 보여준다. 그런 끝에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한다.     

 


 혹시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적 있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인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적 없어?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말이야.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입양아, 뿌리를 찾아 헤맨 이유가 입양아였을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뿌리째 뽑혀 지금 여기 ‘나는’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이식되는 나무가 느꼈을 공포와 입양되는 그 순간 화자가 느꼈을 공포를 그는 오래도록 질문하며 견뎌온 것이 아닐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뿌리를 찾아 헤매며 힘든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가. 

 뿌리 이야기는 뿌리 뽑힌 삶들에 대해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삶들 이후에 남겨져 있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 대한 감상이 있고, 나무의 표정과 냄새에 주목한다. 이 과정에서 조차 작가는 섣부르게 묘사하지 않고 기다린다. 단지 읽는 이에게 ‘보라’라고 한마디 툭 던지며 '상상'하라고 말하고 뿌리 이야기에 앞서서 존재했을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수집해보라고 넌지시 그리고 꽤나 단호하게 말한다.   

   

 여기에서 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 한 장면을 이야기하려 한다. 

 “너를 이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영화 속 혜원이 엄마의 대사이다. 혜원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뿌리내리게’였다.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혜원이를 ‘아빠의 고향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다는 말이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뿌리 내림, 뿌리가 지었을 표정, 뻗어나가는 동안 그 일련의 과정과 시간들, 튼튼하게 뿌리내려준 나의 뿌리들. 뿌리가 뿌리로서의 뿌리내림, 그 뿌리의 근원은 늘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고 그 뿌리로 인하여 우리는 자신을 찾아가고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뿌리는. 


*김숨 ‘뿌리 이야기’는 201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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