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케인 <콰이어트>를 읽고
소녀는 수줍었다. 낯을 많이 가렸다. 덕분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 대신 홀로 사색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유일한 취미이자 휴식은 따뜻한 난로 앞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읽는 그 순간이 그녀에겐 더없이 귀하고 애틋했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 케인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그를 읽고 내 안의 나, 나의 내면에 수장된 그 무엇을 들킨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마음의 화분에 어렵게 자라고 있던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랬다. 게으르고, 멍청하고, 느려 터지고, 재미없다는 말들. 나이가 들어 내가 그저 내향적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본질적으로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가정은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 자그마한 의심의 쪼가리를 찾아내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이상적인 자아란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라고, 강요받고 강요당하며 그에 도전하려 안간힘을 썼던 날들이 억울했다.
“너는 알에서 깨어났니?”
반쯤은 짜증 섞인 목소리, 너는 알에서 깨어났느냐고. 잔칫집에 일손을 도우러 갔다 돌아온 엄마의 자조 섞인 말의 첫 어절이 그랬다. 때가 지나도록 쫄쫄 굶고서,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를 본 순간 화도 났을 터이다. 너는 뭣이 그리 특별해서 다들 와서 먹고 놀다 가는데 왜 남들 다 하는 짓을 너만 못하느냐는 것이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다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되고 편하게 살면 될 것을 꼭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하겠냐고. 그래서 특별한 너는 알에서 깨어난 것이냐는 거다.
그때 시골은 대부분 마당에서 잔치를 했다. 결혼식 장례식 칠순잔치 등등. 그럴 때면 온 동네 아낙들은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모여서 일손을 돕고 가족처럼 모여 밥을 먹고 그랬다. 그러니 지극히 낯을 가리는 내가 잔칫날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감내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당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엄마가 챙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컷 어울려 놀다 오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숱한 비교대상의 말들, 남의 집 새끼들은 다 와서 배불리 먹고 놀다 가는데 너는 어찌 그리 꼼짝 않고 쓸데없이 만화책만 파고 있느냐고.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내포된 엄마의 화풀이에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엄마가 내 맘을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만 했다.
가을 시제 때면 산소(묘지) 부근에는 언제나 긴 줄이 이어졌다. 동네 아이들 대부분은 그 줄에 서서 시제가 끝나기를 기다려 떡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그 줄에도 서 보지 못했다. 자존심도 아닌 그 무엇이 거기 그 줄에 서는 것을 허용하고 용납하지 않았다. 낯가림이라고 해야 할지,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지,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나는 그러한 반죽도 없었던 것인지, 살면서 지금까지 소극적 성품의 알레고리에 빠져 손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처하고 어색하고 쑥스럽고 불편하고 그러한 것들 속에 갇혀 늘 마음이 어렵고 힘들었다. 마땅히 놀아야 할 자리에서 나를 드러내며 제대로 즐길 줄도 몰랐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을 해 보려고, 불편한 것을 견뎌보려고, 무진장 애쓰며 살았다. 외향적 성품으로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좀 더 일찍 이 책을 읽었다면 기질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굴복과 거절에 대한 불편함을 주눅 들지 않고도 감수할 수 있었을까. 모함과 질책이 이어지고 오만과 무례함을 서슴없이 자행해도 어떠한 항변조차 하지 못하던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에 적절한 답을 전달할 수 있었을까. 나는 늘 진심은 통할 거라 믿었다. 끝까지 오해를 풀지 않는다 해도 거기서 그뿐이었다. 대꾸하지 않아 필요 이상의 오해를 받을 때도, 해명하지 않아 더 긴 시간을 어렵고 힘들게 보낼 때도 있었다. 스스로 내 안에 갇혀 혼자의 시간을 무심히 보낼 때 사람들은 ‘멘털이 강하다’고 했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 옳다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쩜 고집이기도 하겠다. 그도 아니면 나를 지탱하고 지켜왔던 정직한 시간을 믿기 때문일 것이고, 나만의 언어로 말이 되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콰이어트'는 세상의 많은 갈등이 내향적 외향적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역학관계라고 말한다. 외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이 미적대고 거절하며 모임에 불응하는 그 죄책감을 이해하기 어렵고,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과묵함이 상대를 얼마나 답답하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내향적인 사람은 시간을 들여 갈등을 해결하려는데 비해, 외향적인 사람은 즉각 문제를 드러내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기질이 있다. 외향적인 사람은 인지능력의 대부분을 눈앞의 목표에 할당하고, 내향적인 사람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제주까지 바다를 횡단한다면 ‘쾌속정을 탈것인가. 나룻배를 탈것인가.’ 그때 10대 후반, 나의 선택은 나룻배였다. 단번에 “가난하게 살겠군” 그랬다. 가난하면 어때. 사색하며 유유자적 가겠다고 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그때는 그리 대답했다. 돈은 필요하면 생긴다는 사고가 나의 저변에는 늘 존재하고 있었다. 당장 해결하고 당장 끝장내고 당장 무언가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닌 조용히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신혼 때 좁고 초라한 단칸방에 책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었어도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고, 그 공간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 좁은 공간의 온도를 즐길 수 있었다.
감성을 생성하는 깊이는 느림에 있다고, ‘콰이어트’는 말한다. 무작정 달려들기보다 차분히 고려하는 기질이 내향성이다. 위대한 철학자 교육자 예술가는 대부분 내향적인 사람이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왜소한 체구를 가졌던 로자 파크스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사자 같은 용기가 있었다. ‘콰이어트’를 읽고 나는 내향성에 따른 온갖 부정적인 인식을 털어버렸다. 조용히 움직이는 힘은 내향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