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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Aug 24. 2021

도농리: 2021년 여름

어느 하루


발코니에서 본 무지개


  이른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건너편 창에 반사된 빛이 주방 쪽창을 통하여 벽에 짠, 나타났다.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맹렬하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반짝 해가 돋았다. 비상식적이게 노랬다. 오렌지빛이었다.


  “곧 무지개가 뜨겠는 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지개가 떴다. 꿈같았다. 무지개다!! 크게 소리쳤다. 앞동 옆동 아파트를 휘어 감듯 펼쳐진 무지개. 발코니에서 폰을 들고 이리 찍고 저리 찍는데 아무리 찍어도 둥근 원형이 다 나오질 않는다. 저녁을 먹다 만 것도 잊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 쪽 저 쪽 어디를 둘러봐도 아파트 숲에 가려 무지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하다. 넓은 하늘이 보일 수 있는 곳을 짐작하며 바삐 걷는다. 도서관 뒤뜰에선 무지개를 다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거기까지 내달리긴 너무 멀다. 무지개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행여 사라져 버릴까 봐 조마조마하다. 가던 길을 멈춰 선 사람들이 무지개를 잡는다. 핸드폰의 푸른 광선이 여기저기에서 흔들린다. 무지개는 유토피아이다.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태양은 작열했고 지열 또한 후끈했다. 뙤약볕에 노출된 발등이 델 것 같았다. 양산을 썼고, 책이 든 무거운 에코백을 멨다. 파란 하늘 몽실몽실한 뭉게구름, 풀포기조차도 눈부신 날이었다. 눈부심이란 스스로의 몫을 제때 제대로 해내고 있구나, 의 감탄이다. 어쩜 안도였을지도. 보도블록 사이사이 돋아난 풀조차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당당하고 싱싱했다. 이 *오녀름 한낮 뙤약볕을 가르며 걷는 길, 도서관 가는 길이었다. 현현한 빛 사이를 걷다 아찔 현기증에 내려다본 발밑. 초록 성성한 질경이 바래기 달개비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식물채집 1호가 질경이었고 2호가 바래기였다. 어릴 적 가장 많이 보았던 풀인 거다. 3호는 달개비 제비꽃 수순이었다. 작열하는 신작로, 눈이 부셔 무념으로 걷는 아이, 식물을 채집하던 그 여름 한낮이 딩동 내 안을 울렸다,


  도서관에 들어섰다. 대여한 책을 먼저 반납하고, 채광이 좋은 유리창 앞에 앉아 읽다 만 책을 펼친다.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새소리도 들린다. 유난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날이다. 책 대신 매미소리를 읽고 새소리를 읽고 창밖 배경을 읽는다. 파란 하늘 흰 뭉게구름 흔들리는 나뭇가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 없는 무능한 나, 이 시점. 두 아이는 저들끼리 제 길을 찾았다. 나는 무얼 해야 할까 흔들릴 때, 너는 책 읽는 모습이 가장 빛난다고 말해 준 이, 그를 생각한다. 맘껏 읽을 수 있는 책이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여름 하루, 한 낮. 생각의 궤적을 따라 사유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나의 감사다. 나는 읽었던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다.


  “페이퍼 코드로 짠 좌면 같은 것은 교회에서는 삐걱삐걱 시끄럽겠죠?”

  “그런 의자를 쓰는 교회도 있어. 삐걱삐걱하는 정도는 예배할 때 적당한 BGM이 아닐까? 예전에는 만원 전철이 크게 커브를 돌면 손잡이가 일제히 끽끽거렸지. 그런 소리는 나쁘지 않거든.”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소설 속 설계사무소 건축가들의 대화, 도서관의 세부를 완성해 나가는 중 그들이 나누는 잡 같은 일 이야기다. 조명회사가 기업으로 성장할 때까지는 조명 디자인도 건축가의 일이란다. 새시나 수도 가구, 나무나 꽃도 건축가의 일이라는 거다. 그러니 채광이 좋은 유리창을 내는 것도 의자가 내는 소리까지도 창밖에 심길 나무나 꽃까지도 건축가들은 염두에 둬야 한다.



  ‘저녁 무렵에 덧문 닫는 소리가 들리면 이제 밤이 시작된다는 기분으로 바뀌었지.’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덧문이 덜컹덜컹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 서둘러서 집에 돌아갔었지.’



  소리도 방향도 창밖 풍경도 건축이라면 도서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에도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사카니시는 무라이 선생이 말했던 덧문 닫는 소리, 덧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의 의미부여를 되새긴다. 이 부분을 나는 읽고 또 읽는다. 장소로 기억하는, 소리로 기억하는, 사물로 기억하는 그 의미. 오늘 이 하루의 날도 마찬가지일 게다. 질경이 바래기 달개비가 견디는 척박한 길의 역사를 기억하듯 무라이 선생이 언급한 소리의 깊이에는 시간의 행간이 마음의 울림으로 잔재할 거라는 믿음인 것이다. 사소한 것들에 이입되는 일상의 몰입 같은 것. 삐걱대는 소리 끽끽거리는 소리도 삶의 리듬이고 배경음악이 되는 것.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문장이 내게 특별한 것처럼.





  도서관에서 빗길을 달려와 저녁을 지었다. 눈부시게 맑았다가 폭우가 쏟아지고 다시 말짱하게 갠 날이었다. 스펙터클 했다. 어둠이 삼킬 때까지 무지개는 걸려있었다. 동심이 아니라 유토피아를 꿈꿨던 게 분명하다. 나는 오래도록 무지개 앞에서 서성였다. 먹다 남은 밥그릇과 반찬이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걸 보기 전 까지는 그랬다. 현실은 언제나 정직하다.

  무지개다! 소릴 지르며 스탕달 신드롬에 빠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일은 이젠 새로울 것도 없다. 그때 같았음 먼저 손 내밀고 이끌었을 그가, 그때 같았음 앞장서 무지개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을 그가, 이젠 그저 미동도 없이 자연스럽게 밥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 먹다 만 밥그릇을 두고 나가는데도 아무런 제재도 없이 식탁에 앉아 있는 그. 그의 인생 건축에도 시행착오가 많았을 텐데. 그는 지금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걸까. 건축가의 질문처럼 안 좋은 의자는 어떤 거라고 생각할까.


  딸가닥거리며 먹다 만 식탁을 정리한다. 밥은 마저 안 먹느냐며 그제야 그가 서재에서 나온다.


  “팥빙수 먹을까?”


  그가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노려본다. 사람이 어찌 그리 무심하고 무덤덤하냐고. 무지개를 좀 보라고 소리치는데도 어찌 밥만 먹을 수 있느냐고? 하하 웃으며 그가 얼음을 간다. 이미 무지개를 보았단다. 보지 않아도 무지개가 보인단다. 소리치는 목소리만으로도 무지개는 몇 번을 뜨고 졌단다. 하하하 마주 보며 웃는다. 감탄에 마지않는 나를 보며 즐긴다니, 용서해 주기로 한다. 그가 만든 팥빙수를 나눠 먹는다. 삶은 시적이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고 위로한다. 여름 저녁이다.


  



도서관 가는 길에서 만난 하늘 구름 풀 보도블록


 *제목은 제임스 에이지의 산문 <녹스빌: 1915년 여름>을 패러디함.

 *‘오녀름’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용하던 언어이다. ‘한여름’의 다른 표현이지만 아무리 한여름을 외쳐 봐도 오녀름의 그 맛을 살려낼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표현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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