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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ul 26. 2022

고래와 요나

허먼 멜빌 <모비 딕>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 32장에는 ‘고래학’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작가는 고래학의 체계에 관한 밑그림을 제시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고래를 세밀하게 분류하는 작업을 한다. 대부분의 소설 독자들은 이 장을, 이와 유사한, 고래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뽐내는 몇 개의 장과 마찬가지로 건성으로 읽거나 건너뛰거나 한다. 나도 그런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그 부분을 슬쩍슬쩍 넘기며 읽다가 장이 끝나는 부분에서 흥미로운 문장을 발견하고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꼼꼼히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의 서술자는 이슈마엘이라는 선원이다. 그는 고래학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고래 분류가 미완성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탑 꼭대기에 아직 기중기를 세워둔 채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쾰른 대성당을 언급하며 그는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법이라고 말한다. 작은 집은 혼자 짓지만 큰 건물은 여러 세대에 걸쳐 완성된다는 말로 자기를 위로한다. 이 장의 마지막에 있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이것은 물론 <모비 딕>의 소설 속 서술자인 이슈마일의 말이다. 그가 초고의 초고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책’이 그의 고래학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그런데 그 문장을 읽을 때 내 귀에는 무엇 때문인지 <모비 딕>의 작가 멜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래학의 체계를 세우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서술자 이슈마엘의 토로가 아니라 <모비 딕>이라는 대작을 쓰고 있는 작가 멜빌의 한탄과 염원으로, 내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대작을 구상했고 집필을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창작의 동력을 잃고 그만 포기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문장은 나의 이런 생각에 은근한 무게를 실어준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중략)



이 책의 32장 어간에서, 그러니까 한국어 번역본으로 194페이지를 쓸 무렵에서 이 소설을 그만 중단해버릴까, 고민했을 것만 같다. 거기서 그가 중단해버렸다면 우리는 이 엄청난 소설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위기를 넘기고 684페이지짜리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때까지 쓴 것의 3배가 넘는 분량을 더 쓴 것이다. 그가 <모비 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들인 것보다 3배가 넘는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떤 시점에 어떤 이유인가로 중단해버린 바람에 독자들이 읽을 수 없게 된 누군가의 어떤 소설을 생각한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얻지 못해 탄생하지 못한 명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신춘문예를 비롯해서 공모전에 수없이 떨어진 어떤 소설가 지망생이 이번에 떨어지면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응모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등단 후 그는 좋은 소설들을 많이 썼다. 그가 시간이든 체력이든 돈이든 인내든, 그밖에 어떤 것 때문이든 한 발자국 앞에서 포기했다면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리 좋은 소설들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멜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쓰기 위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자기 안에서 끌어내야 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p93-96)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모비 딕>을 읽다 중단한 적이 다. 그리고 나는 아마 어린이용 모비딕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 읽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승우 에세이 <소설가의 귓속말>을 읽다가 <모비 딕>을 언급한 부분을 발견하고 엄청 반가웠다.

요즘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영우>에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의 고래학이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영우를 통해 재발견하게 된다. 영우를 통해 듣는 고래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심지어 고래 cg가 나오면 나는 몇 번 돌려서 다시 본다.) 그 덕분에 <모비 딕>을 읽어야겠다는 맘을 다시 먹게 됐다. 웬걸 근처 도서관에 가니 대기자가 3명이나 있다. 타도서관 상호대차를 신청하여 빌려왔다. 이승우 작가의 말을 염두에 두며 읽기 시작한다. 책도 내게 맞는 시기가 있는 것인지, 그렇게 읽히지 않던 모비 딕이 술술 읽힌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몇 부분 옮겨 적는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보기 위한 나만의 방편이다.





그들에게 육지는 달이 지구인에게 낯선 것보다 더 생소하게 느껴진다.

육지를 모르는 갈매기는 해가 지면 날개를 접고 파도 사이에서 흔들이며 잠들듯,

낸터컷 사람들은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밤이 오면 돛을 감아올리고 누워서 쉰다.

그들의 베개 바로 밑을 바다코끼리와 고래가 떼를 지어 지나간다.  

(모비 딕 14장 마지막 부분)



끝으로, 내가 처음에 말했듯이 이 분류법은 여기서 지금 당장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약속을 지킨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쾰른 대성당이 탑 꼭대기에 아직 기중기를 세워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듯이, 나의 고래학 체계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둘 작정이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전체가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모비 딕 32장 고래학 마지막 문단, p194)


샤스트라에 따르면 비슈누 신이야말로 우리의 주님이다. 그 성스러운 비슈누 신은 지상에 열 번 환생했는데, 맨 먼저 고래로 환생하여 영원히 고래를 성별[聖別]했다. 또한 샤스트라에 따르면, 신 중의 신인 브라마는 우주를 해체했다가 재창조하는 일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데, 한 번은 우주를 재창조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작업을 감독하도록 비슈누를 낳았다. 하지만 비슈누는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신비의 경전인 ‘베다’를 반드시 숙독해야 했던 것 같고, 따라서 그 경전에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주는 가르침이 실제적인 암시 형태로 실려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베다’는 바다 밑바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비슈누는 고래로 변신하여 바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신성한 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렇다면 말 타는 사람을 ‘승마인’이라고 부르듯, 비슈누 신을 고래잡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페르세우스, 성 조지, 헤라클레스, 요나, 그리고 비슈누! 이들이 바로 고래잡이 회원 명부에 올라 있다! 고래잡이 클럽 이외에 또 어떤 클럽이 그런 얼굴들을 우두머리로 받들 수 있겠는가?

(모비 딕 82장 포경업의 명예와 영광, 마지막 문단. p444)



앞 장에서 요나와 고래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를 서술했다. 오늘날 일부 낸터컷 사람들은 요나와 고래에 대한 이 역사적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 그리스와 로마에도 일부 회의적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의 정통파인 이교의 통념에서 벗어나, 헤라클레스와 고래에 관한 이야기나 아리온과 돌고래에 관한 이야기에 불신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품은 의심은 그 전설들의 진실성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   


새그 항에 어느 늙은 고래잡이가 있었는데, 이 노인이 히브리 이야기를 믿지 않은 주된 이유는 이러했다. 사실 그는 색다르고 고풍스러운 성서를 한 권 갖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참으로 기묘하고 비과학적인 도판이 실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요나의 고래가 머리에서 두 줄기의 물을 뿜어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참고래와 그 변종만 갖고 있는 특징이다. 그들에 대해 고래잡이들은 ‘1페니짜리 롤빵을 삼켜도 목에 걸릴 것’이라고 말할 만큼 목구멍이 아주 작다. 하지만 제브 주교는 이런 반론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요나가 고래에게 먹혀 그 속에 매장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고래의 입 안 어딘가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선량한 사제가 가질 만한,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다. 실제로 참고래의 입은 트럼프 탁자 두 개와 노름꾼 여덟 명을 다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어쩌면 요나는 속이 빈 이빨 속에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가만 있자, 참고래는 이빨이 없다.


새그 항(그 늙은 고래잡이는 ‘새그 항’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이 예언자의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고래의 배 속에 유래된 요나의 몸과 고래의 위액과 관련된 막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반론도 역시 실패로 끝난다. 독일의 어느 성서 해석학자는 요나가 물 위에 떠 있는 ‘죽은’ 고래의 몸속으로 피난했을 게 분명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병사들이 러시아 원정 때 죽은 말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천막 대신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유럽의 다른 성경 주석자들은 요나가 요파의 배에서 바다로 내던져졌을 때 가까이 있던 다른 배로 곧장 도망쳐갔는데, 그 배의 뱃머리 장식이 고래였을 거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내 견해를 덧붙이면, 오늘날에는 배에 ‘상어’니 ‘갈매기’니 ‘독수리’ 따위의 이름을 붙이듯 요나가 도망친 배의 이름이 ‘고래’였을지도 모른다. <요나서>에 언급된 고래는 단지 구명대 – 공기를 채운 자루 –일 뿐이고, 위험에 빠진 예언자는 이 구명대로 헤엄쳐 가서 익사를 면했다고 주장하는 성서 해석학자도 많았다. 그래서 가엾은 새그 항 노인은 사면초가에 빠진 꼴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요나 이야기를 믿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였다. 고래는 지중해에서 요나를 삼켰다가 사흘 뒤에 토해냈는데, 그곳은 니네베에서 사흘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니네베는 티그리스 강변의 도시로서, 가장 가까운 지중해 연안에서도 니네베까지 가려면 사흘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하지만 고래가 예언자를 니네베에서 사흘 걸리는 곳에 상륙시킬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아니, 있다. 고래는 희망봉을 돌아서 요나를 운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지중해를 끝에서 끝까지 달려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시 페르시아 만과 홍해를 통과해야 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단 사흘 만에 일주하여 티그리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티그리스 강은 니네베 근처에서는 수심이 너무 얕아서 어떤 고래도 헤엄칠 수 없다. 게다가 요나가 그렇게 아득한 옛날 역경을 뚫고 희망봉을 돌았다면, 그 커다란 곶을 처음 발견한 영예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에게서 요나에게 넘겨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근대사는 거짓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새그 항 노인의 어리석은 주장은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어리석은 자만심을 나타낼 뿐이고, 그의 학식도 태양과 바다에서 배운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괘씸한 일이다. 그것은 그의 어리석고 불경스러운 자만심과 성직자에 대한 혐오스러운 반항심을 보여줄 뿐이다. 포르투갈의 어느 가톨릭 신부는 요나가 희망봉을 돌아서 니네베에 갔다는 이 생각 자체가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기적을 크게 부풀린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교양 있는 터키인들은 요나 이야기가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약 3세기 전에 해리스의 항해기에 나오는 어느 영국 여행자는 요나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터키의 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원에는 기름이 없어도 타는 기적의 등잔이 있다고 말한다.

(모비 딕 83장 역사적으로 고찰한 요나, 전문 p44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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