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모으는 거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맥주 코너가 우리에게 보물 상자가 되니까. 그 속에서 새로운 보물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 둘은 키득거리니까. 새로운 병뚜껑의 개수만큼 우리가 남들보다 더 웃을 확률이 늘어나니까. 우리들만의 기쁨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끔씩 병뚜껑을 다 꺼내놓고 정리할 때면 이야기가 끝이 안 난다. 이건 어디에서 마신 맥주지, 이 맥주 맛은 개떡 같았어, 이 맥주 진짜 맛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안 파니? 이 맥주 마셨던 그 숙소 좋았는데, 우리 이번에 거기 또 여행 갈까? 이 맥주 마셨던 그 펍 기억나? 이건 선배가 가져다준 병뚜껑인데, 우리도 언제 남미에 가서 이 맥주 마셔보지? 이 병뚜껑은, 이 병뚜껑은? 이건……. 도대체 포기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누군가 내게 그랬다. 참 팔자 좋다고. 꼼짝 않고 집에서 뭘 하느냐는 거다. 나의 읽기와 쓰기놀이를 답답함으로 치부하고 무용함으로 평가했다. 돈이 되냐고. 얼마 버냐고? 돈이 돼야만 가치 있는 일인 건가. 꼭 돈이 되는 일이어야만 하는 걸까. 돈이 되지 않으면 다 무용한 것인 걸까.
화분에 물을 주다가 햇볕에 반짝 빛나는 그물을 발견한 건 며칠 전이었다. 그동안 수차례 물주기를 반복했지만 거미줄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발코니 그 자리를 거미가 차지하고 있었을까. 며칠 거미의 생태를 관찰했다. 거미는 위대한 건축가였다. 건축가는 창밖에 보일 나무와 심겨질 꽃까지 생각하며 창문의 위치를 정하고 설계한다는데 어쩜 거미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미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 화분과 화분사이로 각도를 정하고 방사상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 사이를 돌아 그물을 엮는 행위가 인간이 가진 예술성보다 더 오묘하고 깊었다. 거미의 건축을 아침 5시 30분부터 수시로 드나들며 관찰하다가 6시 55분 쯤 거미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7시 30분까지 거미가 부지런히 그물을 엮는 과정을 오롯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자리를 뜨지 않고 관찰한 시간은 35분가량 되겠다. 건축을 마무리 한 거미는 방사상 중심에 흰줄을 진하게 긋더니 곧바로 그 위에 누워 휴식에 들어갔다. 1센티도 되지 않는 작은 미물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장엄하고 숭고했다.
1. 아침 6시 55분 2. 7시 16분 3. 7시 30분. *어제 그물은 사라지고 새그물을 짜고 있다. 확실한 건 내일 관찰해봐야 함. 그물을 보면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8시 분무기로 물을 뿌렸고, 햇볕나고 물기가 다 말랐다. 사진을 찍은 시간은 10시 24분. 중앙 작은 물체는 웅크리고 자는 거미임.
거미의 그 오묘함에 진저리를 치듯 빠져들다가 문득, 무용한 것들에 마음을 뺏긴 나의 행동에 자책이 드는 것이다. 팔자 좋다는 말이 생각나더니 급기야 체한 듯 그 말이 목에 턱 걸려버렸다. 읽기와 쓰기놀이까지는 용서해주지만 새벽부터 거미에게 마음을 뺏겨 있던 모습은 용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거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을 상상해보자니 나조차도 기가 막힌다.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매번 쓸데없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사는 무용한 사람이 나란 사람 같아서 내내 마음이 쓰이고 불편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데는 동서 영향도 크다.
동서를 보면 주부는 살림을 잘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온 집이 반짝반짝 빛나며 싱크대며 거실장이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정리정돈이 잘 돼 있어 몸도 마음도 저절로 환해진다. 주부가 해야 할 기본 철칙 같은, 살림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거라는 착각. 살림살이 외 세상 그 모든 것들은 다 무용한 것일 뿐이라는 믿음. 단장한 살림이 깔끔하고 빛이나니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좋으랴 싶은 것이다.
김민철 작가는 병뚜껑 모으기가 취미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병뚜껑을 모은다. ‘도대체 그걸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꼭 있단다. 작가는 ‘무용한 세계가 주는 기쁨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단정한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그냥 모으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모으므로 두 사람만의 무한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는 것, 추억이 쌓인다는 것, 그들만의 포기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라는 것. 꼭 이유가 있어야 그 일을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토로한다.
무용한 일을 하는 사람 여기 또 한 명 있네? 위로를 받는다. 민철 작가는 글도 잘쓰고 살림도 잘하겠지만 나에겐 이 한 문단이 주는 위로가 크다는 거다. 그녀가 말하는 ‘무용한 세계가 주는 기쁨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에 적어도 나는 해당이 되지 않겠구나 싶은 것이다.
야호!!!!
덧.
저녁을 먹고서 김민철 에세이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를 읽다가 문장 하나를 발견한다. 앞부분과 연장선상인 문장이다. 늦은 오후 이미 발행한 글에 나는 다시 덧붙인다. 이들은 결혼전부터 병뚜껑에 빠져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이 무용한 것들로 마음을 나누는 그들의 풍요로움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본다. 그때부터 이어진 그들만의 이야기는 현재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엄청 궁금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깔깔껄껄 웃고 있을, 그들만이 누리는 무용한 것들에 대한 찬가를 무한상상해보는 중이다.
가마쿠라 바닷가에는 병맥주 자판기도 있더라고. 신기하지? 자판기에 코를 딱 박고 까치발을 하고 맥주 병뚜껑을 하나하나 확인했어. 처음 보는 맥주 병뚜껑을 당신에게 선물해주고 싶어서. 어느새 나는 어디를 가든 맥주 병뚜껑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되어버린거야. 습관 하나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데, 사랑이라는 접착제가 당신의 이 습관을 내 몸에 순식간에 장착시킨 거야. 병뚜껑을 챙길 때마다 선배랑 정미가 나를 놀려.
"김민철이 연애를 다 하네요."
"장하다. 우리 철군 (선배는 나를 이렇게 부른다)."
그럼 정미는 또 우리 소개팅 날 이야기를 펼쳐놓지. 수십 번째 반복되는 그 이야기를.
<김민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물을 뿌리면 촘촘하던 그물이 이렇게 변한다. 그게 신기하다. 거미가 그물을 짜는 모습. 1센티도 안되는 아주 작은 거미다
*사진은 갤럭시노트20울트라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