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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Jan 12. 2020

'부재시 문 앞에 놔주세요'

새해 첫날, 경찰 신고를 하다.







이걸 액땜이라 해야 할까? 아무것도 없는 문 앞을 보고 갸우뚱했다. 이틀 전 분명 A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연말연시라 물량이 많은 게 아닐까.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려다가 찜찜한 마음이 들어 어플에 접속했을 땐 이미 '배송 완료' 표시가 떠있었다. 기사님께 확인해본 결과 역시 마찬가지. 순간 짜증이 확 몰려 옴과 동시에 코난에 빙의라도 된 듯 눈이 반짝였다. 이제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이건 도난이다.





판단이 서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새해 첫날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원룸 주인분께 연락을 취해 엘리베이터 내에 택배를 찾는다는 종이를 붙였다. 2020년의 시작을 상큼하게 열어준 누군가를 향한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만약에의 가능성을 염두하여 잘못 가져가신 걸로 생각하니 원만한 해결을 바란다고 최대한 정중하게 써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분이 도착했고, 현관문 앞에서 즉 사건 장소에서 간단한 진술서를 작성했다. 물품 가액은 10만 원 정도로, 별것 아닌 사건에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는 인력들을 동원한 것이 죄송스럽긴 했으나, 1인 가구의 비율이 30퍼센트에 육박하고 '부재 시 집 앞에 놔주세요'가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된 시대에 그것을 깨뜨린데 대한 정의의 심판을 하고 싶었다. 소액이라 신고율이 적은 점을 노린 범인의 괘씸한 생각을 고쳐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 합의란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속에서 무언가 타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경찰분들은 사건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성심껏 얘기를 들어주셨고 원룸 주인분과 상의해 CCTV를 확인한 뒤 연락을 주겠다고 떠나셨다. 그런데 아뿔싸, 빛좋은 개살구였다. 애석하게도 CCTV는 작동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우리 층은 꺼져있어서 공동 출입구와 엘리베이터의 영상만 확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범인이 내부인일 경우 달리 특정할 방법이 없었기에 비통한 마음마저 들었다. 난 널 늘 믿었는데...





사건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송치되는 며칠간, 나는 택배를 주문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집 앞으로 주문하지 않았다. 동거인이 없고 주변에 맡길 곳도 마땅치 않고, 저녁이 지나서야 퇴근을 하지만 약간 떨어진 편의점에서 수령하는 수고를 감수했다. 자취 8년 차, 쿠팡 로켓 와우 스마일클럽 티몬 우수회원으로서 심심할때 소셜을 뒤져 무언가라도 하나 사는 게 소소한 낙이자 즐거움인 내게 그러한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며칠 전 문 앞을 서성거리던 이웃이 생각났고 기사님께서 혹여나 잘못 두신 건 아닐까 하고 맞은편 집 앞의 상자를 유심히 보기도 했고 제일 크다는 중고거래 카페에 물건과 지역을 같이 검색해보기도 했다. 이러던 와중 이 얘기로 열을 올리는 나를 보며 남자 친구가 뱉은 무심한 한마디가 큰 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다. 발화법이 문제이지 물건에는 잘못이 없음에도, 그로 인해 겪고 있는 스트레스가 나비효과처럼 이어지고 있음에 사람이라면 원망할 수도 있으리라 싶었다. 종이에 명시해둔 기한까지 돌아오지 않은 택배에 짜증을 넘어 피로감마저 들어 초기의 의지가 점차 흐려질 무렵이었다.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냥 액땜 한셈 칠까...








사건 4일 차,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토요일 오후, 기분을 환기시킬 겸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던 도중 휴대폰 화면 위로 낯선 번호가 떴다. 습관적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고 나와 비슷한 나이 때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B 브랜드 업체라고 했다. 얼마 전 사이즈 미스로 교환 신청을 했으나, 품절로 환불을 받았던. 더 이상 볼일이 남았나 싶었을 때, 이어진 얘기에 조용한 카페에서 놀란 목소리가 잠깐 커졌다. 여기 저희 제품이 아닌 택배가 도착해서요...









전말은 이러했다. 집 앞에 A 택배가 도착한 것은 30일 오전, 그때 나는 근무 중이었고 집에는 밤이 다돼서야 들어왔다. 집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음을 기억한다. 없어진 것은 이 사이가 맞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30일, 그날 내겐 반품해야 할 제품 B가 있었다. 반품이라 써서 집 앞에 내놓았고 예정대로 모 택배사에서 수거해갔다. 그런데 B 업체 측의 실수인지 다른 택배사에도 이중 송장이 나왔고, 그 사이 집 앞에 홀로 남겨진 A 택배를 반품 상품으로 착각한 기사님께서 잘못 가져간 것이었다. 영수증이나 문자가 없었으므로 수거되었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






허탈했다. 4일간 친구들에게 도난범을 비난하기에 열을 올리고, 사회의 정의가 무너졌음에 탄식하던 결말이라기엔.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미워하고 불특정 다수를 불신하던 그동안의 피로가 허무해졌다. 그리고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건물 안의 선량한 이웃들에게, 의심의 파이를 나누어 주면서 나도 모르게 대문을 흘겨보던 것에. 우선 더 이상의 인력 낭비를 막고자 경찰서, 원룸 주인분, A 택배를 배송한 기사님께 위와 같은 자초지종을 알리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들 역시 이 일이 해결되기 전엔 각자의 이유로 피로감을 느낄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사건 9일 차, 그것이 내게 다시 돌아왔을 땐 함께한 적도 없는데 복잡한 기억과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3번의 배송으로 상자는 많이 훼손되어 7cm가량 찢어져 하마터면 내용물이 보일 뻔했는데, 그동안 내가 겪은 고난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팽개쳐지며 험난한 길을 달려왔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기한이 있었고 도착했을 땐 더 이상 내겐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결국 다시 길을 떠나야만 했다. 갈라진 틈에 안팎으로 테이프를 붙여 보강했다. 먼 길을 떠나왔지만 결국 소속되지 못하고 백화점의 쇼윈도라는 원점으로 돌아갈 그것을 위한 채비였다. 배송완료로부터 이미 일주일이 지났기에 이 과정에서 구매한 A 측에 연장 신청을 하고 그 답변을 듣느라 2일의 기간이 더 소요되는 수고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필요 없어진 물건을, 더더욱 전 남자 친구와의 사진처럼 복잡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을, 이 좁은 방에 두긴 싫었다. 그리고 사건 13일 차, 반품 완료 문자가 도착했을 때야 한동안 나와 내 주위 몇 사람들에게는 떠들썩했던 택배 도난 사건이 막을 내렸다.









이걸 액땜이라 해야 할까?





별 수 없으니 그러기로 했다. 5년 만에 경찰을 불렀으니 이제 한동안 불미스러운 일로 볼 일이 없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덕지덕지 피로를 묻히고 돌아와서 더 이상 무언가 할 기력은 없는데 잠들기는 싫을 때, 손가락 터치만으로 가능한 소중한 취미를 잃지 않았다는 거. 한번 깨지면 회복되기 힘든 신뢰가 지켜졌다는 거. 그걸 위안 삼기로 했다. 폭망한 2018년이 있었고 작년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았으니까 올해는 그보다 좀 더 낫길 바래본다. 액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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