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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요 Apr 16. 2024

조금 싫어하고 많이 좋아해

100퍼센트가 아니더라도


  "여름을 좋아하시나요?”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선뜻 어떻다고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좋은 이유도, 싫은 이유도 분명하다. 싫어하는 이유는 여름의 날씨가 나를 너무나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주 쨍쨍해서 불타버리거나, 아주 눅눅해서 나를 젖어버린 종이 상자처럼 늘어지게 한다. 여름이 되면 미열이 나고 도통 몸에 힘이 없다. 진이 빠지는 계절이다.


 덩치가 큰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고, 더위와 습한 공기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나는 그래서 여름이 싫었다. 널을 뛰는 날씨에 나의 커다란 몸과 취약한 마음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위와 습기를 이겨내느라 모든 에너지를 뺏겼다. 마르지 않은 빨래처럼 축축하고 기운 없이 널려있었다. 그럴 때면 이 몸을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이 싫어졌다. 연교차가 엄청난 이 땅도 싫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왜 여름이 오기 전에 살을 빼지 않았던 거지? 영영 살을 못 뺄 작정이면 겨울만 있는 나라로 이민을 가야 할까? 하지만 어떤 나라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는걸…… 지독한 무기력과 우울한 생각들이 끝없이 들러붙었다. 


 하지만, 여름을 싫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계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여름의 어느 날 시장에 가면 알록달록한 제철 과일이 눈길을 끈다.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살구, 자두를 먹으면 그 새콤한 첫맛과 달콤한 끝맛에 기운이 돈다. 사각형으로 잘라 냉장고에 넣어놓은 수박을 꺼내 먹을 때면 시원함에 몸이 짜릿해지고, 아득했던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밥보다 과일을 많이 먹는 계절, 제철 과일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에는 각종 음악 페스티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주로 록(Rock). 밴드의 공연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전율이 느껴진다. 함께 소리를 지르며 하나의 음악으로 뭉쳐지는 그 순간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함성소리가 더해지면 그 짜릿함은 배가 된다. 나는 무대를 마주하고 관객들과 어깨를 맞추며 그 기운을 한껏 받는다. 음악에 맞춰 뛰고 구르다 보면 몸은 지쳐가지만 마음은 벅차다. 이 짜릿한 즐거움을 비교하자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비슷할 것 같다. 야외에서 며칠 동안 열리는 공연은 당연히 더위를 피할 수 없지만, 그 대가로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면 다음 공연까지 버틸 수 있는 힘도 생긴다. 에너지를 얻었으니 더위쯤이야, 하고 견딜 수 있다.


 여름에는 바다에 빠질 수 있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옥수수를 먹으며 매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느티나무 그늘에 텐트를 치고 누워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냉차를 마시고, 빙수를 먹는다. 해가 길어 하루를 아껴 쓴 기분이 든다. 여름방학과 여름휴가가 있는 계절. 일하는 사람들도 기분이 조금 들떠,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지는 계절이다.


여름을 좋아하는 점들이 이다지도 분명한데, 여전히 나에게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계절 같았다. 여름이 코앞에 다가온 5월 말 6월 초는 신나고도 괴로웠다. 과일을 먹고 록 페스티벌에서 뛰고 있을 내가 신났고, 땀과 열에 짓눌려 진이 빠질 나는 괴로웠다. 신나는 일만 있으면 좋을 텐데 괴로움도 함께라니, 사는 일이 이렇게나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름을 아주 좋아해 버리지 그래? 이제 그만 인정할 때가 됐어.”


 록 페스티벌을 항상 같이 다니는 동생이, 역시나 록 페스티벌에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이제 그만’ 인정을 하라고? ‘때’가 되었다고? 그렇다면 나의 괴로움은 어떻게 되는 건데. 무슨 때가 왔길래 나에게 이런 가혹한 인정을 내리라는 건데.


“언니는 항상 여름을 즐겼잖아. 물론 괴로워도 했지만, 세상에 싫으면서도 좋은 것들은 많아.”


 그러니까 동생은, 누구나 무엇을 좋아할 때라도 그 마음이 온전히 ‘좋은 것 100퍼센트’로 채워지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엄마가 좋아? 좋아. 항상 좋아? 그건 아냐. 이 노래를 하는 밴드가 좋아? 좋지. 모든 곡이 다 좋아? 또 그렇지는 않아. 즉, 무언갈 온전히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동생은 이만, 좋고도 싫었던 여름을 좋아하는 계절로 인정해 주라고 말했다. 그날 페스티벌에서는 최고로 신나게 놀았다. 물론 더위는 참기 힘들었지만, 신나는 마음이 더 컸으니 좋았던 날로 기억하기로 했다.


 여름처럼 신나고 괴로운 것들은 세상에 아주 많다. 신나기만 하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보통의 일이 다 그렇지가 않다.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많은 모습들이 좋다면 그는 나에게 좋은 친구다. 어떤 식당은 찌개를 잘하는데, 비빔밥이 형편없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찌개 맛집이다. 


 왜 나는 좋아하는 것들의 괴로운 부분 때문에 신나는 부분까지 도려내려고 했을까. 괴로움에 유난이었던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그깟 괴로움 때문에 신나고 싶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넘어질까 무서워 자전거를 타는 기쁨을 몰랐던 어린아이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가뿐해졌다. 많이 좋아하고 조금 싫어해도 된다는 허락을 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 초여름, 좋고 싫었던 마음을 정리해 새로운 가족을 들였다. 같이 있는 동안 더 없는 기쁨도, 서로 많이 사랑해 주리라는 믿음도 확실했으나 생명을 책임지고 떠나보내는 괴로움도 분명해서 항상 포기하던 일이었다. 이제는 이 따뜻하고 작은 생명과 최대한 오랜 시간을 함께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나 자신을 믿는다. 조금 괴롭지만, 많이 신나는 날들을 같이 보낼 이 아이는 엄마를 잃은 치즈색 고양이, 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을 딴 ‘여름’이다. 


 이제 누군가가 여름을 좋아하는지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싫어하고 많이 좋아해서, 난 여름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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