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쪽박' 복권은 '대박' 클로드 모네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조인 '인상주의' 그리고 이 운동의 선구자 클로드 모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빛이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연작을 통해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 화가입니다. 특히 말년의 <수련> 연작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요. 오늘 RedFriday에서는클로드 모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소개합니다.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난 클로드 모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지역 유명 인물들을 풍자화 형식으로 그려 팔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이었으나 모네가 그린 풍자화 한 점은 10프랑에서 20프랑 정도였습니다.
1861년 모네는 군대에 징집되어 알제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모네의 아버지는 모네가 그림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면 제대 비용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모네는 이를 거부하고 군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7년동안 군복무를 해야하지만 모네는 징집된지 1년 만에 장티푸스에 걸렸으며 그의 이모가 군대에서 나올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네의 이모는 모네가 계속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파리의 한 예술 학교에 등록시켜줬습니다.
20대 후반의 모네는 프랑스의 주류 미술계에 의해 심하게 낙담했습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예술을 모방하는 것,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장면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계에 들어오고 싶어했던 모네는 자신의 작품이 항상 거부당하자 우울증에 걸리고 맙니다. 1868년 결국 센느강물에 뛰어들었습니다.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이후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예술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행복을 그린 화가'로 불리는 르누아르와도 평생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모네가 인정받지 못하고 혼란을 겪던 시절을 동고동락한 좋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1873년 모네와 르누아르는 파리의 교외에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르누아르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네를 자신의 화폭에 담기도 했습니다.
모네의 첫번째 부인은 카미유 동시외였습니다. 둘은 화가와 모델로 1865년 처음 만났으며 그들은 곧 동거를 하게 되었고, 카미유는 1867년에 둘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당시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고 결혼 전 아이까지 만드는 것은 모네 가문에 상당히 치욕스러운 일이어서 모네의 부모는 모네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까지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돈까지 포기할 만큼 아름다웠던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1876년 사업가 겸 미술품 수집가의 아내인 알리세 오슈데와 불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1879년 카미유가 32세에 골반에 생긴 종양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오슈데의 남편이 죽은 뒤 1892년 모네와 오슈데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오슈데는 비이성적으로 죽은 첫번째 부인에 대한 질투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카미유가 쓴 모든 편지와 카미유의 사진 등을 다 불태웠다고 하네요. 이후 오슈데의 딸과 모네의 아들이 결혼해 다소 이상한 가족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모네는 지베르니의 저택에 살며 풍요롭게 말년을 보낸 것으로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판매만으로 연못이 딸린 대저택에 살며 수련 연작과 같은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1891년 모네는 10만 프랑(약 1억 1천만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어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후 모네가 더 많은 대작을 남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수련 연작으로도 유명한 모네는 그의 대저택에 직접 수련을 키웠으며 이 수련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대단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와 남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수련을 수입해왔습니다. 지방의회에서는 '물 오염'을 이유로 이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들을 없애라고 명령했지만 모네는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수련을 없애기는 커녕 6명의 정원사를 고용해 수련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한 정원사는 매일 아침 연못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간 후 수련을 깨끗하게 닦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수련이 깨끗해지면 모네는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모네는 60대 후반이던 1908년 경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에는 백내장을 진단 받았으며 1922년에는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모네는 위험한 백내장 수술을 1923년까지 연기했습니다. 모네는 팔레트에 있는 물감의 위치를 외우며 그림을 계속 그렸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흐릿한 그림을 보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인상주의 스타일은 예술적 탁월함이 아니라 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두 차례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 시력을 아주 조금 회복했지만, 색상 왜곡이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