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간섭받고 명령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럭저럭 하고 있던 일도 누가 하라고 강요하면 그만둬 버리는 성격 탓에 자랄 때 나름 고충도 많았고요. 이것이 제가 의대졸업 후 임상의사를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군대 못지않은 상명하복 구조 속에서 도저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현재 전공의들이 사직하고 나간 병원은 교수, 전임의, 말년차 전공의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말년차 전공의란 올해 전문의 시험을 치른 전공의를 의미하는데 전공의 중에서 가장 숙련된 인력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의료대란이라고 할만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만 진짜 문제는 그들도 모두 나가버린 3월부터라고 생각됩니다.
“법정 최고형”, “면허취소”, “출국금지”, “구속수사”.. 지금까지 정부가 사직하고 나간 전공의들한테 사용했던 단어들입니다.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만약 내가 전공의였다면..>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저라면.. 돌아가지 않을 듯합니다.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던 일도 누군가 강요하면 그만둬 버리는 그 빌어먹을 성격이 저를 가로막을 듯합니다. 그로 인하여 제 인생이 어떻게 꼬여가든 그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고요.
“의대 2000명 증원 발표를 보면서..”에서 적었듯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왜곡시킨 주범은 지금껏 그런 정책들을 만들어서 운용해 왔던 보건의료 관료조직과 관련 전문가들입니다. 의사들의 문제는 비정상적인 의료시스템을 바로 잡기 위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은 채 현실에 안주하면서 편법으로 돌파구를 찾아가며 계속 잘 살아왔다는 데 있고요.
왜곡된 상태로 가까스로 유지되어 오던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실손보험 도입과 피부미용 및 성형 시장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하여 그 모순이 극대화됩니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실손보험으로 건강보험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던 정부와 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이라는 사회였으나, 대중의 눈에는 그 안에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의사들만 보였습니다. 굳이 법률 용어로 표현하자면 정부와 한국사회는 공동정범이고 의사는 방조범에 가깝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문제가 표면화될 때마다 의사를 단독정범으로 몰아갔죠. 여기에 더하여 급증하는 의료소송은 위중증 환자 비율이 높은 필수의료로부터 의사들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코로나사태 때 이미 한국은 마녀사냥에 최적화된 국가임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의대 증원 2000명, 교수 충원 1000명을 마구 던지는 정부와 이에 환호하는 대중들을 보자니 이제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주요 통치수단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현재 국민의 80% 이상이 정부가 이야기하는 소위 의료개혁을 지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때도 국민들의 85%가 K방역을 지지했고 70%가 백신패스를 찬성했었습니다. 다른 목소리를 냈던 극소수 사람들은 엄청난 마녀사냥과 조리돌림을 당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그들의 주장이 옳았다는 사실이 데이터로 증명되고 있죠.
혹시 지금도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급격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2000명도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질병 진단과 치료에 특화된 의사들이 아닙니다. 신체적, 정신적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인력들이죠. 우리 사회는 고령이 되었을 때 젊을 때처럼 가능한 모든 의료자원을 총동원하여 질병 진단과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와 같은 불편한 질문부터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인구 천명당 의사수가 매우 유사합니다. 둘 다 OECD 최하위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시스템 질을 나타내는 지표인 <치료 및 예방가능 사망률>은 두 국가 모두 매우 우수합니다. 즉, 인구 천명당 의사수라는 단순 통계치가 국민들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표는 국가의 의료시스템에 따라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준공무원 신분인 국가들은 정해진 시간만 공무원처럼 일하기 때문에 의사수가 훨씬 많습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행위별 수가제에 의하여 보상받는 국가로 의사 1인당 효율은 높으나, 의사수가 많아질수록 국민의료비 총액이 증가하는 문제점이 있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경우 한국보다 고령인구 비율이 2배 정도 더 높은, 이미 고령화가 된 국가라는 점입니다. 일본의 고령화 추이를 보면 2000년 고령인구 비율이 현시점 한국과 비슷했고, 그 당시 의사수는 인구 천명당 2.0명으로 현재 한국보다 더 적었습니다. 그러나 <치료 및 예방가능 사망률>은 OECD 탑수준으로 한국보다 성적이 더 좋고요. 어떻게 세계 최고령국 일본은 현재 한국보다 적은 의사수로 필수의료 붕괴도 없이 효율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왜 최근 의대정원 감축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올까요? 링크한 유튜브에서 그 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얼마 전 100분 토론에 나와서 35세 종합병원 전문의 연봉이 4억이라고 이야기했던 K교수는 그동안 한국의 의료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입니다. 즉 현 상황에 누구보다 책임이 큰 전문가라고 봐야 합니다만, K교수는 그 발언으로 국민들의 마녀사냥에 다시 한번 기름을 콸콸 들이부었습니다. 과연 한국에서 4억 연봉을 받는 35세 전문의가 몇 명이나 존재하는지 저는 알 수조차 없습니다만, K교수의 발언에 분노했던 한 전임의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자신의 월급은 400만 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