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진행하는 대학원 수업은 대부분 토론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시간 주제가 <건강의 정의>에 대한 토론으로, 먼저 WHO가 발표한 건강의 정의를 보여줍니다. “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우리말로 풀이하면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닌 완전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의 상태..” 소위 아름다운 단어들의 총집합체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 정의에 대한 본인 생각을 묻습니다. 별생각 없이 제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WHO라는 국제 조직이 발표했다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본인 생각을 덧붙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WHO 정의를 성경 말씀, 불경 말씀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죠.
개중에는 이미 교수의 반사회적 성향을 간파한 학생들도 있는데 그들은 뭔가 비판거리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위 정의에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단어가 무엇일 것 같냐고 추가 질문을 던져보는데, 그러면 꽤 많은 학생들이 감을 잡습니다.
제가 WHO 건강의 정의에서 가장 큰 오류로 보는 단어는 바로 “complete”입니다. 개인이 “complete”한 건강 상태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도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지만, 사회 전체가 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이유는 유기체란 “complete”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오히려 “incomplete”한 상태의 다이내믹과 균형으로 생존하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사태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무분별한 PCR 검사를 하지 않았더라면?”이란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극미량 바이러스 조각만 있어도 양성으로 나오는 PCR검사로 수많은 무증상, 경한 증상 확진자를 양산하면서 사회 공포를 조장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쓴 글로, 그때 2004년 Nature에 발표된 “Cancer without disease”라는 논문을 소개했었습니다.
이 논문은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채 Cancer without disease, 즉 병이 아닌 암을 가진 상태로 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살아생전 암으로 진단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 중 우연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부검해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죠. 예를 들면 40-50대 여자의 3분의 1은 유방암을, 50-70대 대부분은 갑상선암을 가지고 있고, 전립선암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발견된 암은 상피내암으로 주변 조직에는 침투하지 않고 상피세포층에만 국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소위 0 기암이라고 부르죠. 이런 상피내암을 임상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하여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암세포 존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상피내암도 엄연히 암세포가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을 “complete”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현 패러다임 하에서는 당연히 아닙니다. 이들도 암환자로 간주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 적극적인 치료를 받음으로써 “complete” 한 상태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확률적으로 매우 낮다 하더라도 상피내암을 그냥 두었을 때 누구에게는 침윤성 암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의학의 발전은 점점 더 초기의 질병을 진단해 내는 기술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complete"하지 않은 상태의 다이내믹과 균형을 질병으로 간주하게 될 위험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Cancer without disease”로 진단받는 사람들의 숫자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고령자들에게 최첨단 기술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면 그 수는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윤리적일까요? 이를 정부의 통제와 관리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의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의사의 전문가적인 판단과 권유에 따라 진단과 치료의 수위를 조절하고 이 결정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국민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폐해보다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되지 않는 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켜 가면서 결국 공멸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수십년간 박리다매가 의료계 생존 전략이었던 한국 사회는 이미 후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의대 2천 명 증원사태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생각합니다. 의사 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Cancer without disease”도 함께 증가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인데, 대다수 국민들은 의사가 많아지니 암도 조기에 진단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럽게 그리고 흡족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파산의 길을 밟게 되고, 그때는 조속한 진단과 치료를 꼭 받아야 하는 사람들까지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앞서 올렸던 “고령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닌 '00'입니다”는 제가 브런치에 올렸던 글 중 아마 가장 많은 수정을 했던 글일 겁니다. 뉘앙스상 노인들은 의사 진료를 받지 않는 편이 낫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민들은 의사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무조건 의사한테는 불리하고 국민한테는 유리하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한 일차방정식이 아닙니다.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과연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최선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