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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Mar 12. 2024

몽상가의 꿈

좋은 의료시스템이란 그리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해서 자신이 배운 대로 진료하면서 사는데 저절로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반면 나쁜 의료시스템이란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선했던 사람들조차 나쁜 의사로 살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시스템입니다. 대중들은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특히 친절한 나쁜 의사가 많아지면 더더욱 구분이 어려워집니다. 


정부는 수십 년간 왜곡될 대로 왜곡된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한 첫걸음으로 절대 협상불가능하다고 천명한 2,000명 의대 증원 카드를 던졌습니다. 이미 복마전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앞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패러다임 오류 하에서 의사수가 급증하면 어떤 일이?"에서 적었듯,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OECD 국가 평균 의사수>라는 허구의 수치에 혹하여 나쁜 의료시스템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군요. 


아래는 2005년에 발간했던 <호메시스: 건강과 질병의 블랙박스>라는 책에 포함되었던 "몽상가의 꿈"이라는 글입니다. 나쁜 의료 시스템하에서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의사들마저 무한경쟁의 블랙홀로 밀어버리게  되고, 현재의 잘못된 패러다임은 더욱 고착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현 시점 여전히 의미있는 글인 듯 하여 다시 올려봅니다. 




현재 의사는 우리 사회가 매우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입니다. 경제적 보상이 크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얘기가 됩니다만 의사는 사람들의 육체뿐 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지금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현장에 있지는 않습니다만 의사 면허증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제라도 의사로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습니다. 연구라는 것의 가치에 대하여 날이 갈수록 회의감이 깊어가는 요즘, 저는 이 책에 쓴 모든 생각들을 직접 환자들에게 적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만약 제가 직접 환자를 본다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아마 환자에 대한 교육일 겁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구호도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저는 환자에 대한 영양 교육을 영양사에게, 운동 교육을 운동 처방사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환자들의 생활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 패러다임하에서 교육된 그 어떤 생활습관 전문가보다 제가 직접 환자를 교육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아마 첫 만남에서는 최소한 1시간은 주어져야 저를 찾아온 환자와 제대로 소통과 교감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환자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에 쓴 내용들을 환자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취사선택하여 환자에게 반드시 해야 할 것들과 반드시 하면 안 될 것들을 이야기해 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할 것 같아요. “제가 얘기한 대로 딱 3 달간만 해봅시다. 3달 후에 다시 검사해 보고 그래도 좋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적절한 약을 드리죠. 수시로 전화해서 잘하고 계신지 확인해 볼 겁니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은 제가 이러한 의료행위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환자를 보내고 나면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지 않거든요. 말씀으로 먹고사는 바가 아닌 다음에야 저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의료보험공단에서도 저한테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며 환자들도 저한테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저를 도와주고 있는 간호사 월급은 어떻게 할 것이며 제가 빌려 쓰고 있는 이 진료실의 월세는 어떻게 하나요? 1시간 동안 환자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 환자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꿀 수 있도록 교육하고 설득하는 것은 그 어떤 의료행위보다 환자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현재 이런 의사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남는 것은 고사하고 아마 1년 내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버릴 겁니다. 


현대의학은 의사의 힘을 한편으로는 강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불완전한 학문들이 복잡성의 최극단에 위치한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건강을 다루는 의학에 무차별적으로 접목되면서 질병이 도대체 왜 생기는가? 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로 현시점에 이르러 버렸어요. 담배 때문에 병이 생긴 사람들은 어떤 치료를 받더라도 담배부터 끊어야 하고 술 때문에 병이 생긴 사람은 술부터 끊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화학물질에 대한 만성노출로 인하여 병이 생긴 사람들은 현대의학이 제공하는 그 어떤 환상적인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화학물질의 배출을 증가시키고 이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뭔가를 동시에 해줘야지 그 치료가 빛을 발할 것입니다. 


언젠가 환자 교육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도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걱정이 없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저는 기꺼이 사표를 훌쩍 던지고 세상 한 켠으로 돌아갈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현대의학이 제공해 주는 여러 가지 약도 사용할 것이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양한 시술도 할 것입니다. 다만 칠 때는 확실히 치고 빠질 때는 확실히 빠져 주는 의사로 살고자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칠 때는 현대의학이 제공해 주는 최신의 기술을 맘껏 이용하고 빠질 때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치유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몽상가의 헛된 꿈일 뿐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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