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담당하는 모든 대학원 수업은 과목명이 어떻게 붙어있든지 관계없이 궁극적 강의 목표는 오로지 <비판적 사고력 함양>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를 두고 한 달째 강의와 토론을 진행 중에 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코로나 사태만큼 과학, 정치, 경제, 교육, 윤리.. 모든 학문 분야를 다 포괄하는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강의 주제는 찾기 힘들 듯합니다.
지난주에는 <K방역은 왜 독이 든 성배가 되었나> 책을 읽은 감상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본인이 경험한 코로나 사태에 대한 소회>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죠. 제 대학원 수업을 듣는 학생들 대다수는 보건의료기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 사태 현장에서 직접 일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격리병동에서 일했던 간호사, 학교 방역을 담당했던 보건교사, 동선추적 역학조사를 담당했던 역학조사관, PCR검사에 동원되었던 검사인력.. 등등
보고서를 쭉 읽으면서 든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일찍부터 현장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내려오는 각종 비합리적인 지시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위”라고 표현된 실체는 단순히 직장 상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청과 복지부와 같은 최상위에 존재하는 공공보건의료 관료조직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노예였다고 표현하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이건 매우 심각한 징조였습니다.
귀스타브 르봉이 쓴 <군중심리>에는 한 국가가 쇠퇴기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1) 삶의 사소한 영역까지 복잡한 문구로 간섭하는 법과 규제의 증가와 (2) 그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의 수, 권력, 영향력의 증가를 꼽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 국민들은 속박에 길들여지고 자발성과 활력을 상실한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전락하는데 이는 해당 국가가 망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라고 합니다.
코로나사태동안 한국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국민 건강과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법과 규제를 만들어냈고, 이를 이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자신들의 고유업무인 공무원들을 무수하게 양산했습니다. 19세기말 르봉이 예상했던 그 상황이 정확하게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벌어졌지만, 한국사회는 여전히 건강과 안전이라는 구호만 내세우면 모든 것을 권력자들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너무나 쉬운 국가로 남아있습니다.
이번 의료사태가 시작되던 시점,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복지부 차관이 사직서를 낸 전공의들을 상대로 던진 각종 초헌법적인 행정 명령들을 보면서 이들이 코로나 사태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던 탓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조차 못 하는 지경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란 점퍼를 입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통계치와 논문들만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면서 소수집단을 마녀사냥하고 국민 통제에 앞장섰던 그들이 이번에는 녹색 점퍼를 입고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두려워 지기조차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동안 K방역 홍보비가 1200억 원이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번 의료개혁을 위하여 정부가 확보한 홍보비는 90억 원으로 한참 전부터 방송, 지하철, 영화관, SNS 등을 통하여 열심히 의료개혁을 외치고 있습니다. 공공보건의료 관료조직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혈세를 이용하여 국민들을 선동하고 세뇌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했던 K방역이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 수준의 기만적인 방역쇼였음이 세상에 드러난 지 오래지만, 자신들의 오류에 대하여 반성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개혁이 진정한 의료개혁인지 아니면 2000명 숫자 놀음에 취한 의료농단인지는 머지않은 미래에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공의들이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자신들이 최소한 한국땅에서는 노예신분임을 자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중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들은 정부의 모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노예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노예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더군요. 복지부에서 사직하자마자 즉각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면서 전체 전공의의 휴대폰 번호를 입수했다고 발표하는 것을 보고 추노(推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전체 의사 중 10%도 되지 않는, 수련생 신분이기도 한 전공의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거대한 병원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노예, 농노 없이는 유지되지 않았던 역사 속의 그 시대를 연상시킵니다. 총선이 끝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가 될 것으로 봅니다만, 이번 사태가 젊은 의사들이 더 이상 노예로 살기를 거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진정한 의료개혁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