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소년
#1. 머리가 미약하게 아프다. 양쪽 관자놀이가 뻐근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지엔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침대로 와버렸다. 그래, 이 정도면 약 없이 자보자. 이러다가 새벽까지 못 자고 결국 약 먹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든가 말든가. 지불하게 외쳐본다. 그러든가 말든가!!!
#2. 요즘 날씨가 구려서 기분도 구린 것 같다. 사실 기분이 맨날 구리길래 짜증 내면서 살았는데 그게 날씨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갖다 붙이는 걸 수도 있지만 나란 놈이 원래도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 충분히 일리 있는 추리다. 나는 겨울이 싫다. 단지 기온이 내려가는 것만으로 내가 잃은 것들이 너무 그립다. 늦은 저녁에 몇 시간씩 하는 긴 산책, 퇴근하고 냅다 운전해서 가는 한강, 그 한강에서 즐기는 허니버터칩과 카스. 당장 조금만 떠올려도 생각나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는 걸까. 아 머리 아파.
#3. 최근에 에반게리온을 봤다. 아직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잔혹한 천사의 테제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살아있구나 느껴. 초라한 몸속에 들어있는 심장이 이렇게나 힘차게 뛰고 있다니. 내 심장을 위해 살겠노라 다짐했다. 웃기지만 에반게리온을 보면서.(ㅋㅋ) 어떨 때 심장이 뛰는가? 흠. 계단을 오를 때, 술을 마셨을 때, 소름 돋게 좋은 걸 볼 때. 좋은 것들을 곁에 두자.
#4. 흡연량이 너무 늘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휘감았다. 누군가 물었다. 도대체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느낌이 어디로 떠오르는 거냐고. 그냥 머릿속에 갑자기 띵 하고 울리는 거냐고. 설명하기 약간 어렵지만 이 감각은 내가 생각하기에 비흡연자들이 느끼는 가짜배고픔? 입이 심심하다? 정도의 느낌이다. 입이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 어렵군. 그냥 꼴초의 견해정도로 생각해 주길. 쨋든 퇴사하면 담배를 줄여볼 요량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짐만 했다. 경제적 타격도 꽤 크고 말야. 피워서 좋은 건 내 기분뿐이다.
#5. 퇴사한다. 이걸 쓰고 있는 시점에서 퇴사까지 12일이 남았다. 신기하군. 처음 입사할 땐 3개월은 다니려나 했는데 눈만 감았다 떴더니 벌써 8개월 차가 되어있다.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한 타이밍이지. 직원들 사이에서 내면으로 외친다. 저는 떠나니, 알아서 잘들 하세요~ 나의 퇴사는 이렇다.
#6. 자기 전에 짝꿍이랑 통화를 한다. 항상 통화의 시작에선 잠깐만 하고 빨리 잘 거라고 말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은 우습게 지나간다. 너무 행복하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하다. 너무너무너무. 이렇게 말하면 싫어하려나. 근데 뭐 어쩌라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내가 좋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누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