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동료의 존재

by 도현

사람들은 Y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다니다 자퇴한 학교 선생님이라고? 근데 아직도 연락을 해? 선생님한테 왜 이름을 불러?처럼. 사실 이 질문들이 우리의 현재 관계를 '동료'로 정의한다면 대부분 사라지는 의문이지만 애초에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는 동료라는 말조차 어려운 것 같다. 나이가 다르고 직업이 다른데 동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어렵기도 하고. 그치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의 관계를 어떠한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나누고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간만에 적어보는 Y와 나의 이야기. (사실 몇 년 전에도 Y에 대해 써보려 워드를 켰던 적이 있지만 필력의 한계로 무산됐었다.)


Y와 나에게 처음으로 부여됐던 관계는 제자와 교사다. Y는 내가 다녔던(졸업은 하지 못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영어교사였다. 새학기 3월의 나는 장기화된 코로나19로 인한 지겨움, 그 상태에서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압박과 약간의 설렘, 그리고 한국 교육에 대한 피로와 회의감으로 젖어있었다. 무언가를 할 의지가 별로 없었다고 할까. 아무것고 하고 싶지 않았다. 숨만 쉬기에도 벅찼으니까.

그랬던 내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Y의 오리엔테이션. Y는 오리엔테이션에서 다른 교사들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조금 왜곡됐겠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입니다.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Y쌤은 이것들을 약속합니다.


그 약속문은 나의 심금을 아주 강하게 흔들었다. 특히 '평등하고 안전한 공간'이라는 말이 그랬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교사들은 보통 오티에서 학생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만 이것저것 읊기 바빴는데. 하지만 Y는 달랐다. Y에게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지만 고백하자면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저 선생님과 뭐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심장이 그렇게 두근거렸던 순간이 또 있냐고 한다면 과도한 감정포장일까.

아무튼 그랬다.


나는 그 후 곧바로 Y가 담당교사로 있는 인권동아리(이하 선인장)에 들어갔다. 사실 처음엔 Y 한 명만 바라보고 들어간 동아리였는데 하다 보니 에너지가 너무 맞았다. 모두가 맞다고 말하는 것에 아니라고 말하는 게 습관이자 취미이자 특기였던 나는 Y가 이끄는 선인장에서 활동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았다. "선생님 지금 발언 되게 이상하세요."라는 말에 그 말이 왜 이상한 지, 왜 차별적인지 이유를 들어서 따질 수 있게 된 거다. 이 사실이 그 당시엔 나에게 너무 중요했다. 학교 자체가 나에게 그다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 사실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Y와 선인장 덕분에 나는 1학년을 적당히 괜찮게 보낼 수 있었다. 동아리가 2주에 한 번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비율이 아주 간당간당했던 기억이 난다. 항상 너무 좆같아서 못해먹겠을 때쯤 동아리 시간이 돌아왔다.(ㅋㅋ)


2학년이 된 나는 3월부터 위기에 봉착했다. 모든 게 내 예상을 빗나갔다. 겨우 한 층 올라갔을 뿐인데 교실은 너무 숨이 막혔고 옆에 앉은 애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헷갈렸다. 의지하던 친구는 교실이 너무 멀어 만나기도 힘들었고 수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따라갈 수 없어지고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타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군. 그 시절의 기억회로가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것 같다.

정말 정말 수업에 못 들어가겠던 4월의 어느 날 Y에게 면담신청이라는 명목으로 SOS를 쳤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 앞 계단에 앉아 4월의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했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교사였기 때문에 내 입에서 '자퇴'라는 말이 나올 때 놀라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자퇴라는 말은 거의 볼드모트마냥 말해서는 안 되는 단어인가 싶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내 의견을 들어주고 존중해 주고 응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Y는 그런 사람이 되어달라는 나의 말에 아주 충실한 응원자가 되어줬다. 그리고 나는 그런 Y의 응원과 지지를 등에 엎고 생체실험을 시작했다. 과연 내가 학교 밖에서도 잘 지낼 수 있는지. 24시간을 온전히 가질 자격이 있는지 말이다. 학업중단숙려제로 학교를 가지 않던 2주동안에도 틈틈이 Y와 연락했다. 그녀는 내게 4월에 가기 좋은 나들이 장소를 많이 가르쳐줬다. 누군가 내 일상을 이렇게나 응원해 준다니, 지금 생각해도 한없이 황송할 뿐이다.


나는 결국 4월 20일 자로 학교를 때려쳤다. 사실 막바지까지도 나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에게 Y와 선인장의 존재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하는 학교를 떠난다는 게 약간은 두려웠다. 하지만 Y는 그런 나의 마음에 확신을 주었다. 마지막 등교날 받았던 Y의 엽서와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학교라는 장소를 떠나서 이제는 우리 진짜 동료시민으로 만나자. 도현과 함께할 더 많은, 더 넓은 일들을 기다릴게."


Y와 나는 제자와 교사를 넘어 한 단계 더 고차원적인(?) 관계가 되었다. 나에겐 Y가 서로를 동료라고 칭할 수 있는, 칭하고 싶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나의 탈학교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자주 연락했으며 오래 함께하진 못했으나 깊이있는 시간을 보냈다. 함께 강 건너 수제버거를 먹고, 퀴어문화축제를 가고, 카페에 앉아 다정한 대화를 오랫동안 주고받았다. 그녀와 함께했던 날들이 얼마나 다정하고 충만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와 다정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Y에게 처음으로 배웠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다정을 나누고 다정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Y가 너무 소중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벌써 학교를 나온 지 1000일이 넘었다. 학교에 남아있던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고, 사회인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검정고시로 고졸학력을 취득했고, 운전면허를 따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으며, 무려 1년 반 차 직장인이 되었다. 글로 적어놓고 나니 감회가 정말 많이 새롭다. 두려워하던 열여덟의 내가 과거에서 웃고 있다. 마치 잘 해낼 줄 알았다는 듯.


Y는 내가 없는 학교에서 복작복작 열심히 근무하다가 작년 가을 미국으로 떠났다. 마치 그 뒷모습이 '내가 이 한국교육의 미개함을 타파하기 위해 큰 물에서 배워오겠어.' 하는 의기양양한 모습처럼 느껴져서 사뭇 웃겼다. Y가 내게 그래줬던 것처럼, 나도 Y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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