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후퇴

도피라는 말이 주는 무력함

by 도현

나는 현실도피를 참 좋아했다. 꾸준히 어딘가로 떠나는 것도, 노래를 크게 듣는 것도,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몇번이고 다시 보는 것도 모두 현실도피의 일환이었다. 원래 머물던 곳을 벗어나거나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작품의 세계관에 몰입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환기였다. 이것들은 사실 도피가 아니다. 현실이 아니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도 현실이다. 삶을 다시 잘 살아내기 위한 전략에 가깝지. 이런 것들에게 도피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다. 나는 전략적 후퇴를 하는 거야. 다시 살아내기 위해.


1년 만에 간 바다였다. 잘 떠올려보니 작년에도 6월에 바다에 갔었다. 난 왜 이런 이스터에그들을 좋아할까. 2월에만 일본을 세번 갔고 두번의 퇴사도 같은 달에 했다. 아무튼 나는 참 요상한 세계관의 사람이야. 그런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번 여행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운전하는 내내 감탄했다. 한국의 하늘도 이렇게 푸르를 수 있구나. 호주의 하늘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호주의 하늘이 부럽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달리는 자유로움, 한적한 거리가 주는 편안함, 어디든 갈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표정. 혹시나 잊혀질까 싶어 눈과 머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잊고 싶지 않아서. 정말 그랬다.


6월에 바다는 아직 한적했다. 개장이 얼마 안 남았을텐데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그렇게 덥지 않았다. 곧 더워지겠지. 마지막으로 바다수영을 한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에 다시 오고 싶었다.


우리는 물이 빠진 바다를 조심조심 걸었다. 절대 바지 밑단을 적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는 짝꿍이 그렇게까지 신난 모습을 처음봤다. 어린아이처럼 바다를 뛰어다니고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길 잘했네. 진짜진짜. 요즘 우리한테 이런 후퇴가 필요했다. 절대 도피가 아닌 후퇴. 다시 돌아가서 잘 살아내기 위한 잠깐의 후퇴 말이야.


저녁으로 조개구이를 먹고 우리는 해가 지는 해변에 앉아 일몰을 구경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정말 우리 둘 뿐이었다. "되게 비엘드라마 같다." 시맨틱에러 소설 마지막부분이 떠올랐다. 사랑이 어색해서 도망치는 추상우와 그를 쫓던 장재영, 바다까지 도망쳐서 그곳에서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누게 되는 장면. "진짜 드라마 같네." 담배를 나눠 피웠다. 어두워지는 해변에서.


어제 형을 데려다주러 돌아가는 올림픽대로에서 생각했다. 이런 후퇴를 일삼겠노라. 엄마는 내게 역마살이 있냐고 했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정말 '잘' 살려고 도망치는 거야. 이런 후퇴가 내 삶에 자주 있게 해야지.


하루짜리 꿈같은 여행을 하고 돌아온 집은 너무 편안하다. 여전히 나와 꼭 맞는 침대와 물건들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음악이 나오는 공간. 꾸준히 도망쳐야 또 이런 원래의 소중함도 아는 법이라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도망치고 돌아와야지. 엄마한테 물려받은 내 최고의 무기는 행복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