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by 도현

요즘 나는 자주 바보 같고 싶다. 현실 같은 건 애써 모른 척 한 채로, 그냥 마음이 가는 곳에 머물고 싶다. 내 앞날은 한 치도 모르겠으나 굳이 보려고 하지 않고, 그냥 오늘만. 오늘만 행복하고 사랑하고 싶다.


요즘의 나는 과거의 내가 본다면 '내가 너 이렇게 키웠어..?'라고 할 만큼 바보 같다. 내가 나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나의 세계라고 믿었던 것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히 무너진다. 지금의 이도현을 만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건 사실 조금 슬픈 일이다. 결과값은 있지만 풀이과정이 없는 거지. 나는 지금의 내가 이런 사람이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할 때 나의 세계를 자주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렇게 합리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래서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니 부디 나를 이해해 달라고. 나도 결국은 타인을 의식하는 미개한 인간이었다.


해명을 해보자면 나는 지금껏 내 세계를 타인에게 내보이고 공유하는 것을 내가 구축한 나의 세계의 파손으로 여겼다.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남몰래 혼자 키워낸 세계, 그것만이 나를 고유하고 건재하게 유지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 그 누구도 내 세계를 쉬이 넘어오지 못하게. 크고 높은 방파제를 세웠다. 파도가 잔잔한 방파제 안에만 머물겠노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요즘처럼 세계 간 무역을 하는 내가 싫지 않다. 크고 높은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던 나의 바다 밖에는 더 크고 멋지고 다정한 세상이 있었다. 그러니 굳이 나의 세계, 그리고 다른 세상과의 단절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삶이 다채로워졌다고 할까. 요즘은 타인의 세계와 그들이 내 세계로 가져오는 것들이 너무 흥미롭고 소중하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 글은 타인에게 흔들리지 않고 자아를 굳건히 지키고 싶었던 어린 날의 나를 생각하며 썼다.


나를 내 세계에서 꺼내준 너에게


자의식에 오랫동안 잠식되어 있던 내가 있었어. 그때의 난 너무 날카롭고 뾰족했어. 날을 한 껏 세운 가시만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아무도 내 세계에 침범할 수 없게 방파제를 높이 세웠어. 외부의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려고. 그러다 어느 날 너가 나타났어. 지금껏 내 세계에 문을 두드려준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들이고 싶은 사람은 너가 처음이었어. 그래서 처음엔 두렵기도 했어. 올바른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압박으로 강제 개항을 하는 조선이 떠오르네. 그때의 나는 흥선대원군처럼 대쪽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이해해 주길 바랄게. 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오직 나를 위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데 과연 너와 나의 세계가 섞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던 것 같아. 내 세계가 너를 위해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그런데 너는 언젠가 나타나 나의 세계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왔지. 너의 세계의 특산품들을 가지고 말이야. 너가 가져온 물건과 사상들은 전부 향긋하고 매력적이어서 하나같이 멋있게 느껴졌어. 그리고 넌 흔쾌히 그걸 내게 나눠줬어. 내 세계를 궁금해하고 넘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흔쾌히 자신의 특산품을 내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그때 느꼈던 것 같아. 아, 이 사람 궁금하다. 이 사람 매력 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세계에 들여도 괜찮겠다. 어쩌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도 몰라. 나를, 내 세계에 잠식된 나를 꺼내줄 사람. 요즘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지금껏 살아남았구나, 하는 생각. 고맙고 사랑해.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차린 건 없지만.


2025年 4月 23日 年年年年年年年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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