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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02. 2020

낙관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지혜로울 수 있다네

영화 <벌새> 

 개봉했을 때는 인연이 닿지 못해 보지 못했다. 예매까지 해놓고 일이 생겨서 취소했던 영화다. 그 뒤로 주변 사람들의 극찬만 잔뜩 들어 호기심을 가지고 비평이나 스포일러는 다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오늘, 애인과 시간을 내어 봤다.

 다 보고 나서 많이 울었다. 엔딩 스크롤을 따라 수많은 감정들이 밀려왔다. <우리들> 같기도 하고, <가려진 시간> 같기도 하고, <82년생 김지영> 같기도 했다. 동세대의 여성들에게 특히 더 각별한 영화였던 걸로 알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복잡한 감정과 폭력적인 상황들은 한국여성에게 너무 익숙한 것일 테고, 이를 과하지 않되 정확하게 잘 그려내는 점과 단단한 여성서사는 이 영화의 성과이자 장점이다. 그러니 내가 굳이 또 구구절절 그런 부분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시각과 어른에 대한 모습들이 너무 좋았다. <벌새>는 삶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나 인간을 비웃거나 저버리지도 않는다. 세상에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한심해. 지식인은 위선적이야. 사회는 썩었고 우리에겐 미래는 없어...나는 우리에게 있는 영혼이나 가능성을 비웃는 그런 적나라한 이야기, 혹은 자신이 정말 입체적이라고 착각하는 납작한 이야기들에 좀 많이 질렸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해피해피한 것들을 보면 그 단순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이 내내 조마조마했고 또 너무 많이 슬펐지만 (막판엔 진짜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마냥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아서 감사했다.  


 세상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한없이 상처받는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싸웠다가 화해하며 커나간다. 그런데 그 속에서 마냥 상처받은 채 자라는 것도 아니다.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라서 한없이 미숙하고 거칠어서 아이들에게 마냥 나쁜 어른들 뿐인것 같지만, 세상에는 또 분명 좋은 어른들이 존재한다. 나쁜 어른들조차 어떤 국면에서는 자신의 좋은 면들을 드러내게 된다. 그 만남과 순간들이 아이를 자라나게 하고 또 세상을 어찌어찌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아이와 어른 모두, 어떤 면에서는 다리가 황망히 무너져 세상을 뜨는 것 처럼, 이 세상에서 결국 한없이 상처받고 있고...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끝없이 했다. 아이가 울 때 기다려 줄 수 있는 어른. 아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짚어줄 수 있는 어른. 자신의 말에 책임지고, 필요한 경어를 항상 쓸 줄 아는 어른. 크게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의 일을 완수하는 어른. 작게는 삶이 힘들때 자신의 작은 팁을 나직히 알려줄 수 있는...그런 일들을 계속 생각해보게 됐다. 왜냐면 나도,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어른을 탓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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