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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Dec 17. 2016

자립만이 존엄인 세상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쓰다


 이재용 감독, 윤여정 주연의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영화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통상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노인 성노동자가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는 많은 좋은 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영화를 보며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는 2003년 경 갑자기 뇌수막염으로 쓰러졌고, 그 뒤로는 영영 자신의 힘으로는 걷지 못했다. 그리고 2015년에 돌아가셨다. 11년간을 침대와 휠체어에 의지해서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찾아가거나 연락을 할 때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상투적인 대꾸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더 좋은 것들 보셔야죠. 하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그 말은 정말로 아무런 힘이 없었는데, 당시에는 왜 그 말이 힘이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윤여정의 단골 고객이었던 노인이 중풍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여정은 그를 찾아간다. 그 노인은 윤여정을 반갑게 맞이하며 '나 냄새나지' 라는 말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한다. 극 중 설명에 따르면 그 노인은 항상 정장을 차려입고 공원에 나오고 윤여정에게도 항상 친절하게 대하는 젠틀맨이었건만, 지금은 볼일을 보는 것 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삶이 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은 이제 죽고 싶어도 혼자 죽을 수 없다'며 윤여정에게 자신을 죽여주리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윤여정은 농약을 사와서 그 사람의 입에 부어주는데, 벌벌 떠는 윤여정에게 그는 '괜찮아'라고 말한다.


 나는 정말로...그 장면을 보며 우리 할아버지를 많이 떠올렸고, 또 많이 울었다. 왜 그때 내 말들이 힘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멋쟁이로 살던 사람이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하는 신세가 됐을 때, 그때 무너졌던 존엄이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도, 내가 '힘내세요' 따위의 말로 되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립의 감각이란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건 손자인 내가 약속할수도, 보여줄수도 있는 게 아니었다.


 몇년간 할아버지가 불 꺼진 실내에서 티비를 멍하니 보다가 잠들어 갈때마다, 욕창을 치료하고, 볼일을 처리하기 위해 힘들게 몸을 뒤집을 때마다 할아버지 안의 존엄이란 것은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루하루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꼭 멋쟁이가 아니었어도 반신불수가 아니었어도 마찬가지다. 윤여정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을 때 노인들이 잃은 것은 존엄이었고, 윤여정이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것 또한 '내 스스로 먹고 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립의 힘과 감각만이 존엄의 유일한 기준이 되버린 세상에서라면 더더욱, 자립을 잃는 순간 사람은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자립하지 않아도 존엄을 유지할 수는 없나.

 그런데, 이게 어디 노인들만의 문제일까. 자립만이 존엄인 세상에서 취직한 직장인만이, 두다리로 걷는 비장애인만이, 건강에 걱정 없는 젊은이만이, 편견에서 자유로운 이들만이 존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게 정말로 '존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조건부로만 느낄 수 있는 거라면 말이다. 존엄성은 자칫 한발만 잘못 내딛어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의지를 잃은 이에게 '그래도 살아야지요'라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나아 보일 지경이다. 어느 방에서, 거리에서 지금 또 얼마나 많은 인간다움과 존엄이 사라져가고 있을까. 이 세상에서 존엄이란 빛나는 광고 속 젊은 모델들(혹은 젊은이 같은 노인들)에게만 존재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죽고싶다'라고 말하는 이에게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말한다는 건 정말로 사치스럽고 무책임한 이야기가 되버렸다. 그게 신체의 회복이건, 사회의 복지이건, 살만한 풍경과 희망이 있어야 살게 아닌가. 물론 그 풍경은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러나 살만한 풍경이 올때까지 죽고싶은 고통은 계속 된다. 차라리 죽고싶어 하는 이의 죽음을 응원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의미있는 배려라는 생각이 영화를 본 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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