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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17. 2016

사랑하면 알게 되지

[프랑켄위니]를 보고 쓰다

 과학 오타쿠에 대인관계도 좋지 않은 소년 빅터가 있다. 그가 키우는 개 스파키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다. 빅터의 부모는 그가 과학을 하기보다 또래의 아이답게 야외에서 스포츠를 하며 놀길 바란다. 빅터는 마지못해 부모님과 함께 야구를 하러 가고, 그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스파키가 죽게 된다. 슬픔에 빠진 소년을 부모는 위로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지. 나도 스파키를 살릴 방법이 있었으면 살렸을 거야. 하지만 불가능하잖니?' 그러나 소년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파키는 소년의 실험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사고 때문에 온 몸에 덕지덕지 바느질을 했고, 목에는 나사까지 꽂혀있지만 상관없다. 소년은 스파키에 대한 애정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실험했다. 때문에 다시 살아난 스파키가 소년을 알아보지 못한다던가 잔인한 습관이 생긴다던가 하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사건이 터진다.


 이상이 애니메이션 <프랑켄위니>의 전반부 스토리다. 소년의 개에 대한 애정(혹은 집착)이 주된 스토리라인인 이 동화를 2년 전에 봤다면, 나는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게다. 팀 버튼의 작품이 다 이런 식이지-라던가, 그냥 뻔한 애니메이션이네-라고 말했을 게다. '죽음을 받아들여야지'라는 말에도 큰 저항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삐루라는 고양이와 가족이 되었고 사랑에 빠졌다.

 아침에 삐루가 창 밖을 내다볼 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떠날 거라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해진다. 예전에는 여자친구가 자신이 키우는 나이 든 고양이 걱정을 하면 이해하지 못했다. 뉴스에서 고양이를 해친 이들이 나오면 정의롭지 않다고 느꼈지만 분노까지 느끼진 않았다. 삐루를 키운지 1년. 모든 느낌이 반대가 됐다.  퇴근길엔 삐루가 잘 있을지 궁금하다. 여자친구의 나이 든 고양이 걱정에 공감한다. 뉴스에서 고양이를 해친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난다. 똑같이 해주고 싶다. 

이렇게 변한 나에게 <프랑켄위니>란 그야말로 앎과 느낌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삐루는 언젠가 죽겠지. 그리고 이 세상은 팀 버튼의 세상이 아니기에 삐루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죽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더 인간적이라는 걸.  순간이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영원함을 꿈꾸는 게 사랑이고, 아무도 그걸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느낄 수 있다.

 삐루를 키우기 전에도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느끼진 못했다. 서로 사랑하는 개와 소년이 영원히 행복할 거라 말하는 이 영화는 그다지 기발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팀버튼의 영화 치고는 그다지 독창적이지 않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작고 여린 생명에게 자신의 마음 일부를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이라면 [프랑켄위니]는 분명 하나의 이상향이 될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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