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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Mar 01. 2020

품의를 작성해야 하는 진짜 이유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의 레벨업을 위해 쓰는 문서.

 "품의부터 작성하자"

 회사의 규모와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직에서 뭔가 좀 해보겠다고 하면 품의, 혹은 문서화라는 늪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때문에 많은 실무자들이 품의를 번거롭고 귀찮고 시간을 잡아먹는 존재로 인지하고 있고, 또 규모가 좀 있는 조직이라면 문서 작성이 실제로 속도를 저하하는 주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몇년 전에 유행했던 1 page proposal이니 ppt없애기니 하는 액션들이 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일테다 예산 몇백만원을 쓰는 것도 3단계 이상의 컨펌을 기다려야 하고 문서작업이 실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

아이고

 그러나 나는 이런 문서작업을 무조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보다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항상 선호한다. 일단 일과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 수록 이런 문서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구두나 메모로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정확도나 양은 불안정 할 수 밖에 없고, 복잡도가 커질수록 특정 개인이나 그룹에 커뮤니케이션 의존도가 심해진다.


 당연히 위험도 증가한다. 파악이 안되는 예산지출. 추적이 안되는 업무과정. 불명확한 담당자. 누적되지 않는 업무 노하우...규모가 작을 때는 이를 서로 수다떨고 논의하면서 공유할 수 있지만. 일정 규모를 넘어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때 되짚거나, 인수인계 하거나, 경험을 전이할 수 있는 문서자료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기기 마련이고, 아직 경험이 없다면 개인 단위에서도 이를 미리 연습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문서작성 자체가 요식행위가 되거나, 그저 시간을 잡아먹기만 하는 행위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때문에 나도 필요 이상의 과도한 PPT작업 등에 애해 불만을 가지고 있고)


하지만 그러한 행태가 있다고 해서 문서화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회사를 옮기고 나서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위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문서화 작업의 진짜 이점은 따로 있다. 인텔의 CEO였던 앤드류 그로브가 쓴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라는 경영서에 이 장점이 정확하게 나온다. 바로 '훈련'의 기능이다.

"왜 문서로 작성된 보고서가 필요할까? 보고서는 분명히 시기적절하게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서로 된 보고서는 데이터를 보관하고 임시변통의 투입물의 유효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며 놓쳤을지 모르는 사항을 확보하는 일종의 '안전그물(safety-net)'의 역할을 한다. 보고서는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보고서를 구성하고 쓰는 과정에서 작성자는 말로 할 때보다 더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즉 작성자는 까다로운 부분을 규명하고 다루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본인의 생각을 정립한다. 어찌 보면 보고서는 정보 소통의 방법이라기보다 '자기 훈련'의 수단이다. 보고서는 읽히는 것보다는 직접 작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자본지출 승인 과정이 중요하지 승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자본지출 요청서를 작성하고 근거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심도있는 분석을 반복하며 숫자와 씨름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정신적 훈련이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자본지출 승인이 의미 있는 것이다. "

-앤드루 S 그로브.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 中  
위엄이 느껴지는 초판본 표지. 그런데 진짜 좋은 책이다.



 자기 훈련의 과정! 이보다 더 문서화의 필요성을 명료하게 설명한 글이 있을까? 때문에 나는 정말로 직군 상관없이 사회 초년생때 받으면 받을 수록 가장 좋은 훈련은 품의나 기획서, 제안서를 약간의 도움 하에 자신의 힘으로 써보고, 이를 피드백 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이 과정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때 장점-단점을 쭉 적어보는 것이나, 투두리스트를 작성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논리와 이유를 정리하고, 시각화해서 나 자신을 1차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일단은 내가 확신이 들어야 뭘 할 게 아닌가?


 실무자로서 기술적인 부분을 키워나가는 것도 좋지만, 일이란 타인을 대상으로, 타인과 같이 해나가는 과정이다. 때문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와 표현을 갈고 닦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여기서 설득 대상이란 위에 언급했 듯 나 자신도 포함한다. 내면과 내부를 설득하기 위한 문서를 작성하는 훈련이 반복되면, 업무의 가능성과 결과에 대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신중히 검토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업무를 시작하는 단계에서의 문서작업만 일단 정리해보자. 개인적으로 일단은 아래의 세 가지 범주를 고민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실행하고자 하는 일이 현재 환경과 한계 내에서 왜 필요한가? 하게 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숫자적인 목표가 아니라면 어떤 목표에 의해 하는가? 수명업무인가. 유관부서 협조인가. 회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인가. 루틴한 업무인가. 그렇다면 이 이유를 어떤 문장으로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것인가.


2) 이 일이 유관자와 회사에게도 정말 필요한가?

 고려하고 있는 일이 발제자 혹은 소속 팀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은 아닌가? 이 업무를 하게 된다면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나? (마케팅의 경우 대부분 '매출'이나 '이미지'로 끝낼수 있다.)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유관부서나 유관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새로운 업무 가능성 탐색, 공동 목표를 위한 집중력있는 업무 경험 등)


 3) 이 일에 들어가는 리소스는 얼마나 필요하고 어떻게 전개되는가.
 액션을 위해 예산은 얼마나 필요하고, 시간은 어느정도 소요되는가(ex. 3천만원 예산에 준비-실행-결과측정까지 총 1개월 시간 소요) 담당자와 유관자들은 어느 정도의 리소스를 소요해야 하는가?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가? 일의 과정 중에 협의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고 무엇을 참고해야 하는가. 담당자는 누가 되어야 좋은가. (조직의 형태에 따라 자동배정, 혹은 요청 등)  


 외부 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제안서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 있을 테다. 그래도 기본 얼개는 아마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어느정도 준비되고 나면 그 다음 준비해야 할 것은 답변을 읽기 쉬운 구조를 갖춘 글이나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 그리고 공유하고 컨펌/피드백을 받는 과정이다. 이 과정들을 거치고 나면 위에 언급한 부분들을 실무자 스스로가 확실하게 '장악'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나는 이 느낌이 설사 향후에 착각이었다는 판단이 들더라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 실행 과정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실무자가 작성한 문서와 현실은 당연히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문서가 완성된다면 적어도 향후 진행 과정이 내가 짠 그림과 같은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나침반이 생기는 것이다. 이후에 보고서나 결과공유 시 이 근거가 매우 유용해진다.

 또한 문서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 실무자는 '이 일이 왜 필요한지'를 거리감을 가지고 파악할 수 있게 되고, 남들에게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표현력과 논리력을 키울 수 있다. 또,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협동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업무가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겸허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이 과정을 잘 거친다고 해서 일이 잘 된다는 보장이 100% 생기는 건 아니고, 이 과정에 너무 매몰되어 실행과 문서화를 혼동해서도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이제 막 일을 시작했거나, 일은 계속 해왔지만 문서화의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자신이 진행해야 하는 업무 중 7일 이상의 지속적인 투여가 필요한, 이제 곧 시작해야 하는 업무에 대해 자신 나름의 품의서를 써보길 권해드리고 싶다.




 문서의 작성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거나,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구하기 어렵거나, 품의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나 스스로도 당장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아래 다섯가지만 적어봐도 도움이 되었다.

업무의 이유와 목표

업무에 필요한 예산과 시간

업무에 필요한 인적 자원. (협조해야 하는 유관자, 컨펌 필요한 사람들)

업무의 계획-준비(제작)-실행-결과정리로 이어지는 전체 일정

유관자들이 참고해야 하는 배경 지식들과 레퍼런스


 무엇보다 위에 말했듯 이렇게 작성한 문서를 '공유'하고 의견을 청취하거나 컨펌을 받아보는 것이 이 과정의 완성이다. 멋들어질 필요도 없고 모든 요소가 정확할 필요도 없다. 정확한 칸과 줄은 필요없다. 일단 최대한 말이 되도록 뽑아보는 과정이 중요하다. 문장으로 만드는 훈련이 되면, 레이아웃이니 배치니 하는 것은 금방 정리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해야 스스로에게도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법이며, 글이건 그림이건 눈에 보여져야 감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비효율적인 양식의 품의를 유지하자는 게 아니다. 구체화의 훈련으로서 문서작업은 아직 꽤 유용하다는 이야기다. 위의 인용을 항상 생각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문서의 승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성의 과정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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