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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12. 2020

가방 블라인드 테스트

좋은 물건을 손에 쥐었을때의 감각에 대하여.

 주말에 친구가 들고 온 가방에 팍 시선이 꽂혔다. 근데 디자인이 단촐해서 별 생각 없이 이거 어디서 산거야? (=무신사? )라고 물어봤는데 알고보니 만다리나덕 백팩이었다. 아이고야. 무심코 얻어먹은 밥이 고오급 레스토랑 식사인 느낌...입맛만 쓸데없이 높아지면 그날 저녁이 피곤한 법이다.

 가격 검색을 해보니 30만원 가까이 된다. 롯데면세점으로 가면 25 정도. 사진으로 보면 진짜 단촐한 가방인데, 실제로 보면 그 태가 남다르다. 살다보면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노라벨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작년에는 동료가 가져온 가방이 말도 안되게 이뻐서 "와 이거 무슨 가방이예요? 선 너무 이쁘다" 하고 보니 생로랑이었다. 애인이 샀던 삭드주르도 생로랑인지 모르고 봤다가 이게 도대체 무슨 각이냐며 감탄을 하고 봤더란다 (주로 생로랑이구나) 옷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고.



 그런 본의 아닌 테스트 이후 나는 다시 한번 물건의 가치 혹은 양품을 보는 눈에 대해서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됐다. 잘 만들어진 물건들은 자신의 소속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나름의, 혹은 압도적 포스를 자신의 선에서 뿜어낼 때가 있다. 물론 거기에 라벨을 끼얹어버리면, 선의 디테일을 보기 전에 이미 양품이고 명품이라는 인지에 빠져버리기도 하지만. 그래서 나는 명품이 '브랜드 값' 이라는 이야기를 100% 동의하지는 않는 편이다.  



 당연히 세상에는 제 값을 못하는 양품도 분명 있고, 이런 존재들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곤 하는 걸 보면 우리에게는 좋은 물건의 선을 알아보는 감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감각은 상당히 후천적인 것이고 계급의 생활에 따라 훈련되는 것이지만...나 자신도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각으로 이 물건이 좋은지 안좋은지를 택배를 까는 순간부터 아주 귀신같이 잘 알아본다. 잘 마감된 제품을 손에 넣었을때 주는 그 충만한 느낌은 참 매력적이니까.

 반면 잘 마감되지 않은 어설픈 물건은 쥐는 순간 느낌이 쎄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박물관이나 전시를 가서 쓸데없는 굿즈를 그렇게 사다 나르는 게 아닐까. 그 '쥠'의 순간이 너무 좋아서 말이다. 문진이니 마그넷이니 하는 걸 지금 이 시대에 어디다 쓰겠는가?


그런 이유에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손에 잡히는 물건을 파는 일을 쭉 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해서 재밌다-라고 하면 되게 아름다운 결말이겠지만 그것은 아니고...손에 잡을 수 있는 것. 그런 개념에서 브랜드니 메세지니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모두가 명품이 되자!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실제 세계에 산다. 우리의 뇌는 미묘한 차이를 포착한다. 그리고 내가 의도를 가지고, 내 자원을 지불하고 획득한 결과물을 손에 넣었을 때의 경험과 감정은 꽤 강력하다. 사실 마케팅이나 브랜딩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손이 양품을 잡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매끄럽게 관리하고, 기대치를 높이는 일의 총칭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마케팅. 저렇게 하는 브랜딩. 유난히 그런 '비법'과 '기술'이 많은 이 세계에서 그런 말들이 점점 더 허망하게 들리는 것이다. 기술과 비법의 끝에서 나타나는 건 내가 물건을 팔아야하는 잠정적 계약 대상이자 미묘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A/B테스트의 객체 혹은 지표일 뿐이지 않겠는가? 어떤 양품을 만들 것인가, 혹은 양품이 가능한가를 얘기하지 않고 말하는 나머지 전략들은 얼마나 의미없는 이야기인가 싶고.


 브랜딩+퍼포먼스를 결합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보이는 타임라인을 보며, 나는 아직 다 공부도 못했건만 퍼포먼스라 불리는 어떤 판이 벌써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요 며칠 많이 했다. 사람은 양품을 알아보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뇌를 가진 존재인데, 언제까지 빨간버튼 파란버튼 중 무엇에 더 반응하느냐만 가지고 설득할 수는 없겠지. 좀 더 복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시점이고, 그 복합적 사고에 능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정말...많다. 그렇게 생각하니 요즘 심각하게 떨어졌던 의욕이 조금 고개를 살짝 드는 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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