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타기인생 Jun 15. 2020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다면.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할 때, 혹은 연명 치료의 리스크가 삶의 존엄성을 빼앗을 가능성이 높을 때, 생존을 위한 치료에 매달리는 게 맞는지를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이다.  


 그러니까 현대의학은 잘못됐다! 연명치료는 악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다른 옵션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그 옵션이란 완치, 연명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남은 제한 시간동안 존엄을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의사도 환자도 모두 계속 문제해결이라는 목표에 휘둘리는 흐름 속에서, '혹시 더 살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기대를 버리고 우리가 삶의 마지막을 직시할 수 있다면? 언뜻 듣기엔 패배주의적인 사고 같다. 그러나 책 속에는 얼마 안남은 죽음을 두고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남은 삶을 살겠다고 선택한 이들이 얼마나 좋은 마무리를 거뒀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통계들이 나오는 데 매우 놀랍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패배고, 비극이라는 사고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죽음은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렬히 돌진해서 몰살당하는 장군이 아니라, 적절히 후퇴하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장군인 것이다. 


 물론...죽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은 쉽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실날같은 희망을 안고 고된 치료를 감내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그러할테고. 


 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고, 이를 기반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쩌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우리는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내 뜻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마지막의 존엄이란게 무슨 거창한 삶이 아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추구를 볼 수 있으면 충분하고' 낙상의 위험이 있더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포기하고 '원할때 내 손으로 산책할 수 있으으며' 내게 익숙한 식기와 집기들이 놓여진 공간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삶. 그런 소소한 삶일지라도 그것을 당사자가 택하고, 마지막 시간을 뜻대로 진행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책에서도 연명치료를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환자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가 당연한 수순으로서 죽음을 좀 더 받아들이길 바라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저 병원에서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떠나기 보다는 좋은 마무리로 삶을 마감하길 바라며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죽음이 코 앞에 왔는데도 그것을 치료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이 현대사회에서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용기를 가져보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정말로 아름답고 숭고하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언젠가는 지고 마는데, 어차피 예정된 패배라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순간 아닐까. 


-


 이 책을 이야기하면 결국 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은 다른 가정에 비해서 유독 죽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나눠왔다. 불교집안이라는 면도 강하게 작용했다. 나 자신도 9살때부터 가족의 장례식을 봐 왔다. 아직도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인사드리고 입맞춤 했던 기억과 이르게 세상을 떠난 가족의 장례식을 치룬 기억들이 생생하다.  집안 어르신들도 그것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내가 조금 철이 든 순간부터 자신이 원하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화장해달라는 것은 기본이고, 장례도 조용히 치르라고. 만약 그들이 사고나 병에 걸리게 되면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삶을 마무리하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반박하곤 했다. 그렇게 돌아가시면 남은 이들이 얼마나 슬프겠냐고. 같이 힘을 내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리고 노후의 요양원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생각했다. 모든 부양을 가족에게 지우는 한국사회에서 요양원의 순기능도 분명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투병생활, 그리고 마지막 순간과 작년 불행한 사고 후 응급실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며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나는 외할아버지의 요양원 생활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구나. 부모님이 연명치료가 싫다고 했을 때 그 속에 숨어있는 공포의 이유를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책에서는 요양원이 주는 끔찍함이란 오로지 안전만을 위해 자유와 존엄을 제약하는 데서 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직원이 아무리 친절하고 시설이 아무리 깨끗하더라도. 요양원이 노인들에게 공포스러운 이유는 자신이 만들어놓고 스스로 따르는 삶의 습관들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오로지 건강과 안정만을 목적으로 하는 통제가 자리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맹목적인 연명치료 또한 이와 같아서 그저 살아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지속하지 못한 채, 마지막 정리를 할 시간조차 놓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작년의 그 사건 때부터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모든 것을 부모님 뜻대로 해야지. 연명치료를 하겠다면 그렇게 해야지. 만약 포기하고 집에서 여생을 마치시겠다면 그에 따라야지. 그런 상황이 되면 나도 내가 하던 일을 잠시 정리하고 부모님과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마련해 놓아야지. 요양원은 정말 최후의 최후의 방법이고, 고되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집에서 삶을 마무리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지. 그리고 나도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야지.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그저 단순한 연장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정리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 말이다. 이 책을 보니 그러한 전환이 맞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는 정말 죽음이 두렵고, 내 주변의 그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정말 잘 죽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질들의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