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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May 04. 2020

저질들의 사회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

 기분이 울적해서 미뤄놨던 <임계장 이야기>를 금새 읽었다. 이 책은 공기업 은퇴 후 여러 사정으로 아파트 경비, 터미널 경비 등 노인에게 주어진 몇 안되는 비정규직을 전전한 조정진 선생님이 3년여간 쓴 일지를 엮은 책이다. 노인 일자리 문제의 열악하고도 참담한 현실, 계속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제도의 구멍과 인권 유린의 상황이 너무나 가슴아프게 펼쳐지는데, 그와 별개로 또 한승태 작가의 <인간의 조건>에서 나타났던 것 처럼 한국 사회의 수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고 몰염치하며, 저질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채널들이 얼마나 서울/고학력/젊은이 위주의 일화들뿐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아파트 자치회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경비를 개만도 못한 취급 하는 자. 썩은 사과를 건네며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일자리 보전할 수 있다고 선심을 쓰는 자. 자기한테 온 택배도 제대로 간수 못하면서 괜한 것들이나 트집잡는 자. 길고양이 때문에 놀라서 쓰러진 딸 때문에 몇날 몇일을 경비를 볶는 자. 벌레가 가득한 숙직실의 이불을 세탁해달라고 하니 니들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정규직 직원.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지급해 달라고 하니 노인네가 살면 얼마나 살려고 말하는 놈. 방한복을 지급해 달라고 하니 노인도 추위를 타냐고 물어보는 새끼....이 책을 보다보면 제도의 개선이 쉽지도 않거니와 개선되더라도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여전히 소리치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피할 수가 없다. 이들을 인터뷰하면 아마 그것이 다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말할 테고, 그들도 뉴스에 나오는 갑질 에피소드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참혹한 노동일지의 사이사이엔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는 작은 연대들이 나온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미화원 할머니를 도와줬던 이야기. 빌딩 경비 때 콜센터 노동자들과 나눴던 담배와 커피. 그리고 저자가 마지막에 쓴 말. 자신의 노동이 너무나 힘들었으나 <현대조선 잔혹사>와 <웅크린 말들> <소금꽃 나무> 그리고 <그의 슬픔과 기쁨>을 읽고 '이제는 덜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마음. 인터뷰에서 조정진 선생님이 자신의 사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중요하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두자. 왜 반성과 슬픔과 성실은 모두 약한 자들의 것일까? 이 책이 부디 반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부디 읽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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