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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Apr 12. 2020

에릭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맨 아래의 발췌글은 에릭 R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 인류학과 정치경제학으로 본 세계사 1400~1980> 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이 책은 1400-1980년의 시간동안 '역사 없는 사람들'로 치부됐던 유럽 외 인간사회와 유럽사회의 상호작용을 다룬 책이다. 이 사회들과 구성원들이 단순히 희생양으로 그친 게 아니라, 어떻게 유럽에 희생당하고, 그러면서도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재구축했는지를 마르크스의 주요 개념들을 통해 전 지구적 관점에서 펼쳐보인다.

 유럽이 당도한 지역으로 상품이 오가고, 그로 인해 새로운 관계와, 사회와, 상품이 발생하며 기존의 사회체제가 어떻게 파괴되고 재구성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유럽과 지구는 같이 어떤 경로를 따라갔는지 등등...

 그래서 이 책을 쭉 따라가고 있으면 '총체'란 단어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각 사회가 유지하고자 했던 것,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들이 우연한 경로를 통해 혹은 필연적으로 축적되고 접합되는 과정이 나타나고, 그런 과정들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쭉 펼쳐보인다. 다만..책을 읽고 나면 당연하게도 입맛이 쓴데, 총체적 시각은 그저 이 책 속에 파묻힐 때 뿐이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총체적 시각을 가지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훈련한다 해도 유지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더더욱 갖기 어려워졌고.


 우리가 사회의 변화 속에서 '더 적게 다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생각하기 전에 체제의 변화 속에 휩쓸리는 게 우리의 삶이니. 이러한 공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아직, 생활인이라 할지라도 사상을 기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믿는 구식의 사람이지만 사상을 기르는 일이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까? 그러고보니 이런 생각도 이 책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해보네. 세계를 역사적으로,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즐거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노동계급들의 출현은 근대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숨은 의제였으나, 학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가 생겨날 때 이 노동계급들이 한 역할을 인정하는 데에까지 오로지 머뭇거리면서나 나아갔다. 이 노동계급들이 역사라는 무대에 등장하자 대중들이 진출하면서 사회적 무질서를 낳으리라는 두려움이 퍼져갔고, 동시에 한편에서는 사회적 일신이 임박했다는 부풀려진 희망들도 품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사회학이 기본적으로는 "도덕" 과학이라고 규정하던 터라, 이 새로 등장하는"대중들"이란 근본도 없고 규범도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인문학자들은 또 그들대로 인간 정신이 낳은 고상한 성취들을 보존하는 것이 관심사였던 만큼, 이 프롤레타리아들은 로마 시내로 쳐들어와 벌써 자기네 말들을 마구간에 몰아넣고 있는 동 고트족을 떠올리게 했다. 혁명가들 쪽에서 보면, 이 노동계급들은 사회적 변혁의 전망을 체현하고 있었으니, 그러니까 문명의 반명제가 되는 "신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이 신인간들을 좀 더 주의해서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조차도, 이 신인간들을 대체로 사회적 문제들로 - 그러니까 탈부족화나 이주 때문에 자기네들의 근본과 단절되면서 생겨난 문제들로-취급했지, 독자적인 사회적 행위자들로서, 새로운 조건들에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심지어 노동사가들도 처음에는 노동자 조직들이나 노동운동의 역사에 집중했으니, 다시 말하면 어떤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노력들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지, 이 조건 자체를 기술하는 쪽으로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연구 자체가 주로 매달렸던 것은 거기 없는 것이었다 - 곧, 한때 있었다가 이제는 없는 조건들이나 특징들, 아니면 장차 다가올 조건들이었다.


 결국 더 적게 다루게 된 것은 거기 있는 것들로서, 노동계급이 존재하게 하는 관계적 영향장과 그 존재의 내용이었다. 최근에서야 몇몇 사회사가들이 노동계급들을 둘러싼 흐름들의, 또 관계들의 역사라 할 것을 쓰는 쪽으로 움직였으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어떤 진화의 정체기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집단들을 놓고 이제 역사를 쓰기 시작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사실 역사의 이 두 지류는 한 흐름일 뿐이다. 이 지구 여러 대륙의 "역사 없는 사람들"이 지나는 궤적들은 유럽이 팽창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등장하면서 만들어낸 더 큰 영향장 안에서 서로 맞물리며 수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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