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 다리미와 다이소 다림판
사회인이 되고 다리미를 바로 샀다. 신입 때는 셔츠를 입을 일이 많아 사야만 했다. 살림 마스터의 스킬 중에 다림질이 있으니 필히 익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첨에는 스팀을 썼다. 도통 주름이 펴지는 기분이 들지 않아 건식이 되는 필립스 다리미를 구매했다. 소심해서 그 와중에 스팀이 같이 되는 걸 샀다. 다이소에서 다림판도 구매했다. 그렇게 사서 7년이 넘게 쓰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건식만 되는 날렵한 디자인의 모델로 살 걸 그랬나 싶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회사를 그만 둘 생각만 했던 날들의 주말엔 셔츠를 다리며 마음을 정리했다. 물을 뿌리고 다리미를 데워서 밀면 치익 하는 소리가 나고 주름이 펴진다. 그렇게 반듯해진 옷을 보면 스트레스가 잠시나마 사라졌다.
슥슥 밀어도 되는 등판보다는 옷을 펴주고 걸쳐주고 모서리까지 밀어줘야 하는 앞부분의 다림질이 더 개운하다. 출근이 너무 무섭고 화나고 죽고싶은 일요일 밤, 옷 대여섯벌을 다림질 하며 세상 일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비관적인 나를 자책했다. 그런 내용의 글도 종종 썼었다.
이제 나는 다림질 해야 하는 셔츠도 잘 입지 않고 다리미로 마음을 다잡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멋진 셔츠를 여러벌 사서 뽐낼 수 있는 일잘러 프로가 되었다. 업계에서도 알아준다...라는 이야기였다면 좀 더 깔끔했겠지만 유니클로나 FRJ가 무신사 스탠다드로 바뀌었을 뿐이고 여전히 일은 해야 할 것 모자른 것 투성이다.
여전히 잘 다려진 셔츠를 보는 일은 개운하지만 이제는 그냥 살림으로서의 다림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사회생활의 우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스트레스에 좀 더 강해졌고 일을 좀 더 잘 받아들이게 됐고 회사 탓을 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그리고 이쁜 셔츠를 입기에는 몸이 좀...더...부해졌다.
물론 인생에 그 죽고싶은 날들이 다시 오지 말란 법은 없지. 그러나 그럴 때, 일요일 밤 10분이라도 맘을 다잡을 살림 노하우가 몸에 남았다. 방을 치우고 다림질을 하며 52번의 주말 104번의 주말을 보내고 나면 문제들은 결국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걸. 그러니 지난날의 우울했던 일요일들도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