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나는 나름의 판단을 끝낸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나면 무력감과 불쾌감만 느껴진다. 그래서 차라리 대체역사 같은게 더 좋다. 서양인들이 아우슈비츠 문제는 이렇게 잘 다루면서 현대의 팔레스타인에는 흐린 눈을 하는 것도 지겹다.(조너선 글레이져의 훌륭한 태도와는 별개로) 다만 이 영화가 다루는 모습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는지는 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할 이야기가 우리 모두 많을 것이다.
관심영역(zone of interest)이 극도로 좁아진 사람은 죽음의 비명과 냄새에 눈을 돌린 채 살아간다. 그건 사회와 문화의 압력이기도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은 적극적이고 악랄한 선택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실존인물 루돌프 회스는 나치당 이전에 정치깡패에 백색테러 살인범 경력이 있던 악질 중 악질이었다. 이런 자에게 무슨 평범성이 있겠는가?
현대로 돌아와 강하고 부유한 자들에 대한 칭송과 답없는 탐미주의. 약자들에 대한 역겨운 험담 속에서 나는 루돌프 회스의 파편들을 본다. 나는 이 데미지 큰 영화의 가장 멋진 점은. 아름다움과 깔끔함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소리를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때려박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이쁜 장면에 반응하려는 찰나 소리와 맥락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이 아름다움을 가장한 역겨움과 악덕을 드러낸다. 그 신경을 긁어대는 소리들이 권력으로 칭송받는 자들의 본질이다.
악덕의 파편들은 언제나 소박한 바람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족이 중요하니까. 가족을 위해서. 나의 꿈이었으니까. 부자 되고 싶은게 죄야? 남들처럼 살고 싶은 게 좌야? 동쪽의 땅에서 이성애자 가족으로서 정상 가정을 꾸려 번영하라! 이런 특정 모델을 우월한 것으로 제시하는 보수적인 제도가 소박한 바람을 키우고 썩히고 그런 말들이 모여서 적극적이고 악랄한 선택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모델은 얼마나 다른가.
이들은 아무리 좋은 꼴을 하고 있더라도 아우슈비츠 담장 옆의 아름다운 정원과 같을 뿐인데. 조금만 거리를 벌리면.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그 역겨움과 한심함은 너무나 명명백백하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보통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는 이들은 언제나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살 만한 이들이었다. 1945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 엔딩 크레딧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끊이질 않아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무수히 많은 이들이 밤중에 과일을 숨기고. 역겨운 연기가 피어오를때 창문을 닫으려 함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