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타기인생 Aug 23. 2024

요요대회의 본질

룰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핵심은 존재한다

요요대회의 본질은 공연과 표현이다. 그런 맥락에서 클리커 룰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적어보고 싶다. 지금의 요요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 낸 것에 대해 클리커 룰이 한 역할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성평가의 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클리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클리커 저 너머’의 예술적인 기술과 구성들도 결국 이 룰을 베이스로 한다. 


단순히 빠르게 밀도있게가 아니라 풍성한 움직임의 가짓수를 늘린다는 점에서 클리커 룰의 영향은 크다. 이것은 이를테면 어떤 혁신적인 문학 작품이 나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말과 글을 본질로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룰은 완벽할 수도 없고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다.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 기술을 판정하는 시간이 매우 짧고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즉각적으로. 반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심판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 한계를 받아들이며 플러스 마이너스를 측정해야 한다. 중복체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가? 심판 입장에서 애매한 시각지대에 있는 기술은 어떠한가? 


두번째.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공평무사하게 어려운 기술과 쉬운 기술 몇가지를 제외하면 심판별로 가중치를 주는 기준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요요라는 스포츠가 기본적으로 연기와 공연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축구 처럼 골 넣어서 점수를 겨루는 스포츠도 이게 맞네 틀리네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진다. 연기이기에 표현이 중요하고. 선호와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이 심판의 취향과 연결된다. 무엇이 멋있는지에 대해. 좋은 공연과 기술과 표현인지에 대해 심판마다 다른 기준을 가진다. 


근데 이런 영역은 또 좋은 취향이 좋은 심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심판을 두고 그 평균치와 경향성을 뽑는 것이다. 단 하나의 기준만이 가능했다면 심판은 한명만 세우면 된다. 


혹시 대회장에서 여러 심판들이 클리커를 찍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있다면 가만히 귀 기울여보시라. 아무도 동일한 타이밍에. 동일한 갯수로 찍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이 있었다면 클리커는 언제. 누가. 다시 찍어도 같은 점수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FE 점수도 마찬가지다. 아니 더 심하다. 그런데 그게 나쁜 것인가? 나쁜 것이라면. 이제는 심판들의 클리커 찍는 타이밍과 갯수까지 체크해서 단일화 시킬 것인가? 그것이 좋은 심사를 보장하는가? 절대 아니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이 룰이 ‘무엇이 더 잘하는 것인가’를 여러 사람의 다양한 판단을 통해 가리고자 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룰의 허점과 한계가 존재하며 이것조차도 대회와 공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게 스포츠의 본질이다. 피겨스케이팅 룰 개정의 역사를 보면 세상에 난관도 이런 난관이 없다. 요요는 차라리 양반이다. 


룰에 기반하여 게임을 펼치지만 룰은 불완전하고 사람은 그 룰에 대한 해킹과 해석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과정이 스포츠의 재미를 만든다. 이게 누가 해도 점수가 똑같이 나오는 거라면 그건 스포츠도. 공연도 아니다. 그냥 객관식 시험이지. 클리커만 생각하는 선수와. 룰의 유기적 구성과 공연의 본질을 이해한 무대를 보여준 선수 중 누가 더 좋은 선수인가? 


해마다 모든 대회를 둘러싸고 심사의 적합성을 이야기하지만 보통 1위에는 이견이 없다. 항상 그 이하에서 평이 갈린다. 그렇다면 애시당초 논쟁가들이 이야기하는 ‘선진적인 국제 룰’이란 닿을 수 없는 환상인 것이다. 요요 대회가 열린 이후 단 한번도 그 모델에 도달한 적이 없다. 25년간 봐온 사람의 말이니 믿어봐도 좋다. 나는 앞으로도 도달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게 요요의 즐거움이나 좋은 대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심판진은 당연히 규정된 룰을 최대한 준수하고 합의된 기준 하에 채점하며 부정을 방지해야 하지만 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주관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단 3분간 우리 감정을 자극하는 무대 위의 표현을 보고 있기에 각자가 다른 만큼 다른 심사를 할 수밖에 없다.


또 그렇기에 우리가 계속 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이다. 표현과 공연의 문제라 생각한다면 내 점수와는 무관하게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낮은 점수라 하더라도 관객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지한 선수로서 취해야 할 태도란 무엇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24년의 취미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