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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08. 2019

정치가의 균형이란 무엇인가

헨리 키신저, <회복된 세계>

<회복된 세계>는 미국의 전설적인 외교관 헨리 키신져가 쓴 역사책입니다. 헨리 키신져라고 하면 냉전 시기 중국과 미국의 관계개선을 이뤄내거나, 미국-소련간 핵무기 제한 협정 등을 끌어낸 업적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칠레의 악랄한 독재자였던 피노체트 정권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냉전기 미국의 음모들을 사실상 뒤에서 꾸민 사람이란 의혹을 받는 양반이지요.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은 키신져에 대한 그런 평가를 미뤄놓고 한번쯤 적극적으로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는 '빈 체제'라고 불리는 시기로, 나폴레옹이 패한 이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일의 재발을 막을 것인가?'와 '나폴레옹의 원인이 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골자로 확립한 체제입니다. 저자는 이 체제가 어떻게 성립되고 운영됐는지를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빈 체제는 당시 변하고 있던 시대를 탄압하기 위해 비밀경찰,언론검열 등을 적극적으로 펼쳤지만, 한편으로는 어찌됐건 '평화'를 위해 국제공조를 적극적으로 취했던 체제이기도 하죠.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빈 체제를 하드캐리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후작.


 빈 체제를 고등학교 세계사나, 보통의 교양서에서 배울 땐 빈 체제란 시대의 흐름을 무시한 반동적인 체제이고, 이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영국의 캐슬레이는 시대착오적인 음모가이자 수구주의자라고 배우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근데 키신져는 이 '반동적'인 체제의 흐름 속에서 인간 정치와 외교, 더 나아가 인간성에 대한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 냅니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영국의 캐슬레이는 왜 그러한 반동적 체제를 꾸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세계관, 그리고 외교의 대단함 이면에 숨겨진 한계는 무엇인지. 등을 읽고 있자면 우리는 <회복된 세계>가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매우 풍성하고,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헨리 키신져라는 사람의 롤모델인 메테르니히에 대한 팬질(...)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말하는 주제들이 결코 가볍지 않고, 현재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메테르니히와 함께 빈 체제 구축의 일등공신이었던 영국의 캐슬레이 자작.

 

 이를 테면 그는 정치 혹은 외교 (책에서는 경세, 라고 말하는) 의 본질과 지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두가지의 실패를 이야기합니다. 민족주의-자유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해체될 수밖에 없는 오스트리아의 국내 상황에 집착해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한 메테르니히의 실패. 그리고 섬이라는 지형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유럽의 공조에 관심 없는 영국 국민의 이해를 초월해 국제관계를 사고했고, 그래서 국내와의 소통에 실패한 캐슬레이의 실패를 대조하며 정치인의 균형이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식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이 혁명이 '불가역적 변화'란걸 알 수 없었으나, 역설적으로 메테르니히는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또는 나폴레옹이나 혁명가들의 패권적, 이상향적 기질과 정치가들의 현실적, 기술적 기질들을 대조하며 결국 이상적인 정치(경세)란 이 두가지의 중점을 실행하는 건 둘째치고 파악하는 것 조차 큰 사명이라고 이야기하거나, 사실(팩트)이란 단순한 정보일 뿐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대안과 정책을 창조해나가는 것이 정치의 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을 읽다 보면 우리의 현실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에 대한 묘사들도 매우 입체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보고 나면 메테르니히가 얼마나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고 연결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러나 창의력이나 겸손함은 없는 사람이었단 사실과, 그의 외교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당장의 화는 면했지만 결국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여 무너졌다는 사실까지도 알수 있게 됩니다. 이러면 이 사람이 단순히 보수-진보의 문제를 넘어서 역사의 어떤 본질을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명확하게 꿰뚫고 있는 대가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역사에 대해 지은 죄와는 별개로 말이죠.


무엇보다 이 책은 - 제가 이런 류의 책을 소개할때마다 항상 덧붙이는 말이지만 - 재미가 있습니다. 아마 삼국지, 초한지 등의 역사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듯 한데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외교전 과정을 다루는 저자의 문장이나 전체 구성이 매우 박진감 넘치고 유려합니다. 당연히 소설보다는 난이도가 있었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빠져들어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한반도라는 공간이 처한 조건을 빈 체제 당시의 유럽에 어설프게나마 도입해보고 한국에서 정치라는 것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보너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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