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15.03.15)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은 받는 질문은 '왜 그걸 좋아하게 됐어요?'일 게다. 그럴 때 통상 우리의 대답은 "그냥 재밌어요. 좋아요"에 그치기 마련이다. 사실 나는 그 대답이 일말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실이란 우리가 뭔가를 좋아하기 위해선 그걸 '잘'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잘 해서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나 자신에게도 진정 의미있고 즐거운 활동이 된다는 점이다. 만약 특출나게 잘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남들에게 내세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건 취미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의미란 결국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내 자신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잘 해냈을 때 받는 칭찬도 기쁜데. 자신이 정말 의미 있다고 믿는 일을 할 때 타인들이 보여주는 관심의 중요성이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도 나 홀로만의 의미란 없는 셈이다. 하다 못해 테러 조차도 지지자가 있는 이 시대에 타인의 관심이란 돈보다도 더 귀중한 것 아니겠는가.
좋건 싫건, 찬성하건 반대하건 우리는 타인의 관심을 통해 평가되는 세계에 던져졌다. 예술 혹은 의미있는 일이 대중의 호불호를 떠나 순수와 전위의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종국에는 그 세계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항상 영화속의 깐깐한 평론가 같은 자세를 취할 뿐이다. '진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 (당신 때문에 좋은 공연이 설 기회를 잃었어/남들의 시선은 신경 안써)'라고 말하는 그들은 타인의 시선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이미 인정욕구의 다른 측면일 것이다. 반면 대중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리건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버드맨의 환영처럼 타인이라는 지옥을 향해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불안해 할 뿐이다.(사람들의 반짝이는 눈을 봐 )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돌파구는 양자의 사이에 있다. 평론가의 의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폐허이고. 버드맨의 의미는 무한히 도는 지옥과도 같다면 거기서 어떤 종류의 성취나 의미를 기대할 수는 없다. 리건의 연극이 비평에는 실패하고 티켓만 매진되었다면? 그는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 <버드맨>은 성취에 있어서 순수의 세계를 택하거나 대중의 세계를 택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이야기를 한다. <버드맨>은 퇴물배우가 연극감독으로 재기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리건이 정말 좋은 감독인가, 극단의 사람들은 정말로 훌륭한 연기자인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재기담에서 그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리건이라는 인물의 컴플렉스와 그가 연달아 저지르는 실수들이며, 그런 사건들과 생각들을 횡으로 종으로 엮어내며 연극의 공연 첫 날을 향해서 치닫게 놓아둘 뿐이다.
그 결과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리건의 성공은 좋게 말하면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의 성공 요소의 반 정도 이상은 리건이 그토록 싫어한 버드맨 경력과 그가 등한시했던 미디어,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고의 결합에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왕년의 슈퍼히어로 무비스타가 연극을 만들었기에 그정도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프리뷰 기간동안의 의도치 않은 기행이 (혹은 무지가) 트위터의 엄청난 조회수를 불러일으키며 연극에 대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그가 꽃병을 집어던지며 욕한 '아무것도 보지 못한' 비평가가 쓴 평론을 통해 연극은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연극인, 혹은 예술인으로서 성취라는 것도 버드맨의 인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둘의 성공 모두가 '예기치 못한 무지의 (혹은 대중의) 미덕'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때문에 이 영화는 연극의 성취나 영화의 성취나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중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옹호자 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리건이 마지막으로 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도 아마 순수와 대중 취향 사이의 그런 동질성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길 바라는 것과 별개로, 리건의 마지막이 어쩌면 자살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평론의 극찬 속에 창밖으로 버드맨이 떠났지만 버드맨 없이는 결국 이 성공도 불가능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이제 그러한 성공의 기회가 다시 오진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 남자가 택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초탈하거나(비상) 자살하거나(추락)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장 예술적이고 순수해보이는 성취조차 사람들의 관심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퇴원 후. 혹은 상승 후 버드맨은 어디에서 '의미있는 일'을 찾을 것인가. 애시당초 의미와 관심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진정으로 모든 것을 건 성취조차 결국 사라질 관심에 기초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