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입과 입 사이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부유한다. 쟤가 아프대. 쟤가 동성애자래. 쟤가 어쩌고 저쩌고 그렇대. 애저녁에 나는 그런 게 싫어 대부분의 걸 공개해버린 사람이지만,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거나 그걸 나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면... 나는 커다란 무기력감을 느끼고 만다.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퀴어 잡지라서 인쇄소에서 인쇄를 거부당했을 때, 암성 통증에 대해 심인성이라고 판단당했을 때. 나는 그때마다 타인이 당사자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게 가족이고 연인일지라도. 사람들은 예술과 잡담을 통해 간접 경험을 반복하며 공감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하지만 나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당해보지 않으면 결코 몰라.” 서늘하게 정리하는 건 못내 아쉽지만, 이 문장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오롯이 곁에 있었기에 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것은 어설픔이다. 어설픈 공감의 언어는 대체로 투사를 바탕으로 하며, 상대가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수탈하고야 만다. 상대방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취하면 마약성 진통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에게 “죽지 마.”라고 속삭이게 된다. 이 경험은 나에게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강한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공감은 나와 타인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찾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므로 사려 깊은 질문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나도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가 있다. 상황과 조건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어설플까 봐 두려워 입을 다무는 건 일종의 회피다. 그나마 내가 알게 된 것은 함께 만들어 갈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먼저 묻는 것이 좋다는 거다. “제가 위로해도 될까요?”라는 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