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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진 May 26. 2020

몇 개의 단어들 2

고춧가루


청국장을 끓이다 말고 철희가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청국장에 고춧가루가 들어있어…” 자글자글 끓는 국에서 느닷없이 고춧가루를 발견하고 울컥했나 보다. 매콤한 음식을 먹으면 심한 복통을 느낀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서야 알아냈다.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반찬들은 모두 버렸다. 텅 비어버린 냉장고를 보고 철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린 나를 보살핀 철희는 우울해했다. 내가 아프면 종일 울상인 철희.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식사를 차리는 철희는 이제 놀라운 창작요리도 한다. 누군가의 삼시 세끼를 모두 챙기는 건 너무나도 고된 일이지만 철희는 ‘힘들다’는 생각을 한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지 말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이다. 철희야 고마워, 맛있게 잘 먹었어, 대단하다, 최고야. 이 몇 마디도 자주 말하지 못하는 못난 주둥이에는 미안함과 좌절감이 밥풀처럼 묻어있다. 철희가 울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눈웃음을 볼 수 없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그 눈웃음 때문에 전생을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



조감도


아픈 새를 업고 하늘을 나는 새가 있을까. 본능적으로 작은 새는 보호자의 육체에 빈틈없이 몸을 밀착시킨다. 나는 한 사람의 등짝에 매달려야 겨우 풍경을 볼 수 있게 된다. 오늘도 마찬가지. 친구들이 나를 위해 준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 통증 속에서 땀만 흘리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병원에서 진통제를 받아온 보호자가 소식을 전한다. “타케시가 그린 작은 새가 업혀있는 독수리 그림 봤어?” 새들은 가본 적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큰 날개 덕에 우리는 마치 하늘 속에서 멈춰 선 것만 같다. 근데 철희야, 내가 너무 무겁지는 않니? 너무 빤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철희를 비롯해 많은 친구들이 지저귀며 또 노래하며 하늘을 날고 있다. 한껏 욕심을 부려, 이 풍경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7주년


오르지 않는 혈소판 수치 때문에 둘 다 허둥지둥하다가 7주년 기념일을 놓쳐버렸다. 끼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철희가 침실로 달려왔다. “기념일 놓쳤다…” 침대맡에서, 나는 눕고 처리는 기대앉아서 오래된 첫 키스를 추억했다. 우리는 버스 뒷좌석에서 노닥거리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버렸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고, 구파발 방향으로는 차들만 달렸다. 처음 와보는 장소였다. 휑한 보도에서 코트 깃과 목덜미를 붙잡고 차가워진 입술을 몇 번 떼었다가 붙였다가 했다. 아마도 둘 다 기분 좋게 웃었을 것이고, 반지하 방까지 걸어갔을 테다. 가을밤의 추억은 우리 둘에게 선명히도 남아있다.


오래오래 돌아왔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

힘들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어젯밤엔 체온과 말로 만들어진 선물밖에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원근법


늦가을부터 시작된 기침이 해가 바뀌어도 나아지지 않는다. 가끔 피가 섞인 가래가 나와도 그러려니 한다. 양치질을 좀 세게 했더니 구내염이 한 30개가 생겼다. 징그러운 입안을 좀 보라며 친구들을 괴롭혔다. 입안이 따끔거려도 참고 철희가 만든 불고기를 먹었다. (치료 방법이 바뀌어 더는 복통이 없다.) 고춧가루가 만들어낸 엔도르핀을 드러누워 만끽한다. 암환자가 누운 곳은 해변이다. 잠깐 쌓아 올린 모래가 잔파도에 흩어진다. 어떠한 덩어리와 모양도 부질없다는 듯이. 매일 스러지는 육체를 다시 현상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본다. 옷도 다려 입고 화분에 분무도 한다. 우울한 것은 아니다. 적응을 마치지 못해서 그렇지, 나 자신을 새로운 원근법에 집어넣는 일이 그러할 뿐. 나는 그런 세계에 있다.



날짐승


신촌에서 별을 읽는 사람이 그랬다. 도진씨는 평생 남의 돈으로 사는 사람이에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량이 돼서 철희에게 얹혀살 거라고 농담이나 했으니까.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올해 봄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생명을 사 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벌새처럼 바삐 움직인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날개바람에 내 생명이 어딘가로 흩어졌다고 생각하니 황홀하기만 하다. 환란의 모래 언덕을 넘는 모험에는 다 함께 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친구. 친구친구. 친구친구친구. 오늘도 나는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뱉는 기회를 얻는다.


히로카와 타케시의 판화 〈飛べない鳥ヤン〉 출처: https://url.kr/INeA8G
6주년을 맞이해 속초를 찾았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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