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그녀를 도운 건 미래의 나를 구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그 비명소리는 잊히지가 않는다. 2년 전 겨울, 늦은 밤이었다. 명동역에서 당고개행 4호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늦은 퇴근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오로지 앉아 가겠다는 일념으로 칸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빈자리를 찾았다. 기어코 찾아냈고, 앉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고개를 드니 창밖으로 길음역 플랫폼이 보였다. 잠시간 멍해있는데 다시 비명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세요.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비명을 지른 주체는 20대 여성이고, 옆자리 50대 남성이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는 것. 처음에는 모른척하려고 자세를 바꿔봤지만 계속 만졌다고 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셀카 모드로 놓고 문제 상황을 영상 촬영해 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경찰을 불러달라, 누구든 도와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세 명이 일어섰다. 셋다 여자였다.
A는 지하철 경찰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방금 길음역을 지났으니 다음 역이나 다다음 역쯤에서 기다려주세요. B는 동영상을 확인한 후, 자는 척하고 있는 용의자를 깨웠다. 아저씨,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다 찍혔어요. 나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있기 싫으면 저쪽으로 갈까요? 금방 경찰이 올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찰 오기 전까지 자기는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라고. 성추행범 옆에 가만히 앉아있겠다고. 아니, 못 움직이겠다고. 마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 열차는 미아사거리역에 도착했고, 용의자는 탈출을 시도했다. 문가에 앉아있던 20대 남성 2명이 그를 저지했다. 나는 그새 B에게서 휴대폰을 넘겨받아 동영상을 확인했다. 성추행범은 팔짱을 낀 자세였고, 겨드랑이 사이로 손가락을 뻗쳐 여성의 가슴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쳤더라면 저 사람은 의사나 교수일 거야,라고 생각할 만큼 이지적이고 평범한 외양의 남자였다.
경찰은 수유역 플랫폼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가해자와 피해자, 나, A와 B까지 다섯 명이 동시에 내렸다. 경찰은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고, 동영상을 확인했다. 시간은 이미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경찰이 물었다. 아저씨, 다 찍혔네요. 인정하세요? 성추행범은 만진건 인정하지만 자기가 술을 먹어서 못 참고 그랬다고 대답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실수라고 했다. 피해자는 엉엉 울었다. A와 B, 그리고 나는 경찰에게 신상 정보를 주었다. 진술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돕겠다고. 무엇이든 다 돕겠다고.
역사 밖으로 걸어 나오며 A, B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A는 자기도 예전에 한번 당해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B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어떻게 안 도울 수 있겠냐고 했다. 나는 A와 B가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다가갈 용기가 생겼다고 대답했다. 혼자 있었다면, 무서워서 절대 도울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내가 그녀를 도운 건, 어쩌면 미래의 나를 구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들과 헤어진 후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유난히 추웠고 캄캄했다.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세상이 험한데 다 큰 여자애가 이 시간까지 안 들어오고 뭐하니? 그러게 엄마, 세상이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