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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치 Nov 09. 2020

설국


 앞으로도 살면서 이렇게 기차탈 일이 많을까 싶어. 기차라는 공간이 상념에 사로잡히기 참 좋은 곳이야. 나는 멈춰 있고 풍경은 바뀌니까. 혹시 알아? 예전에 비둘기호라는게 있었어. 제일 느린 기차. 대구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갈 때면 여섯시간이 넘게 걸렸어.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가곤 했는데. 네 고향도 그렇게 멀리 있는 걸까.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볼까 해. 알다시피 나는 늘 다 궁금해하잖아. 네가 이십년을 살았던 그곳에 가게 된다면, 아이폰 말고 정성스레 감아넣은 필름카메라로 풍경을 담을게. 호기심과 근사함을 담아서.


 원주에서 지난한 겨울을 보내면서 기차에 앉아 눈 덮인 바깥을 보는 일이 많았어. 그 때마다 나는 너에게 전화하는 상상을 했어. 당장 말고 잠이 오지 않는다던 어느 새벽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어줘야지 했었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이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나는 이 첫 문장을 읽으면 너무 아름답고 공허해서 슬퍼져. 가끔 아침에 커피를 사러갈 때, 가위에 눌렸다거나 새벽 네시에 잠들었다는 말을 듣곤 할 때면 간밤에 네게 전화해서 잠들 때까지 이 책을 읽어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 우리가 서로에게 새벽 두시에 전화해도 꼭 받을, 핫라인같은 존재였다면, 너는 더 단잠을 자고 나는 덜 후회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숨이 안 쉬어질만큼 몸이 아파도 전화하기 싫은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이제 여름이 오나봐. 한낮은 20도가 넘어가. 그런데 내게 원주는 끝나지 않는 설국이야. 너는 겨울이 가면 봄이 온댔지만, 글쎄, 우리에게 봄이 있을까. 함께 기차를 탈 날이 올까.


 K가 나보고 꽃샘추위같은 사람이래. 그 단어를 듣고 웃었지 뭐야. 네가 그 단어를 뱉을때 내가 얼마나 웃었니? 아저씨같은 단어라면서. 겨울같기엔 유약하고 봄같기엔 쌀쌀맞은 나를, 잠시나마 따뜻하게 잡아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네 말랑거리던 순간의 진심같은거, 진심이었다고 믿으면서 살게. 다른 건 다 잊어도 춥고 깊은 밤에 소주 한잔 하며 나누던 속얘기들은 자주 꺼내볼게.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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