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500일의 썸머
매거진을 시작할 때, 지금 '연애휴식기'에 있는 내가(실은 연애를 못해서 안달 내고 초조해하고 있는) 지난 연애들을 정리해본다면, 하는 마음이었다. 매거진 타이틀의 일부이기도 한 영화 <500일의 썸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내 연애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기에. 치앙마이에서의 밤을 하루 남겨두고 <500일의 썸머>를 다시 봤다. 늘 썸머는 나쁜년이 아니라는 관점으로 스스로와 주변을 설득하며 봤던 기억뿐인데. 마지막이니 이렇게 한번 생각해볼까. 내가 톰이라면 어떨까.
'당신도 사랑은 안 믿잖아요?'라고 묻는 썸머에게 '사랑이잖아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라고 대답하는 톰.
가장 행복했던 날들 중 하루에 사실 심각하게 널 만나는 건 아니라는 말을 듣고도 웃던 톰. 다른 남자들처럼 질색을 하면 행복이 끝날걸 알아서, 겁이 나서 그랬던 걸 안다.
빠르게 달리다가 날다가 결국은 혼자임을 느끼는 꿈을 얘기할 때, 내가 톰이었다면 그녀가 가여워서 어쩔 줄 몰랐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벽을 세우고 또 세우는 연애 상대를 만난다면 나는 금새 포기해버리고 말 거라고. 저런 인내심이 내게는 없다고.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안다. 원치 않는 대답을 듣기 싫으니 지난 몇 달 간의 환상 속에 숨고 싶은 마음을 안다. 내 연애가 늘 그랬다. 확답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데, 확답을 묻기는 두려운 것.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화면이 이분할 되며 둘의 어린 시절이 재생된다. 놀이터에서, 해변가에서 뛰노는 두 아이. 한 명은 축구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말을 탄다. 고작 몇백 일을 만났다고 그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굴 때, 그리고 상대가 그런 나를 알아챌 때 종종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모든 갈등은 거기서 시작됐다. 서로의 삶을 아는 척하는 순간. 누가 톰이고 썸머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했는데.
한 때는 썸머이기도 톰이기도 했던,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 늘 탓만 해서 미안해. 모든 실수를 자기합리화로 똘똘 감싸 덮으려해서 미안해. 지나고 보니 다 별거 아니다, 그렇지? 썸머가 나쁜 사람만은 아니듯, 톰도 이유가 있었겠지. 할 수 있는 한 오래, 다르게 살아온 서로를 인정하고 진심만이 오가는 연애를 하며 살자. 나도 다음 연애는 한번 그러려고 노력해볼게.
그럼 모두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