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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y 09. 2023

브이 말고 다른 걸 해봐

어쩔 수 없어 나에게는

  어릴 적, 우린 주말마다 전국을 쏘다녔다. 나의 의지보다는 부모님의 의지가 더 컸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 나이대 엇비슷하게 자라 보니 일주일 내내 일을 하고 주말 새벽부터 운전해서 여행을 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점, 그 모든 열정이 나와 동생에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부모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얼마 전 여수로의 가족여행 마지막 날, 동생을 미리 내려주고 셋이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5차선 고속도로에 차들이 꽉 들어찼다. 날은 저물어 차선은 흐릿한데 차들은 많고, 그날따라 왜 이리 차들은 빠르고 가깝게 달리는지. 운전하며 벌벌 떨던 내가 물었다. 어떻게 주말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품이 이렇게 나는 운전길을 어찌 그렇게 안전하고 신속하게 달릴 수 있었느냐고. 엄마랑 아빠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라고 말하면서도 절대 후회라는 단어는 모른다는 듯이 허허, 하고 웃었다. 


  한창 여행을 다닐 땐,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자 여기 보세요! 김치!' 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카메라 앞에 선 나는 매번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 하고 웃었다. 나에겐 그 포즈가 최선이었으니까. 난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할 만큼 넉살 좋은 아이는 아니었다. 관심은 부끄럽고 소외는 서러운 애매한 그런 아이. 그래서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면서도 그 앞에선 씨익 웃으며 브이. 그게 나였다. 수많은 여행지의 사진 속 나는 늘 같은 표정과 같은 손가락으로 서 있었다. 점차 키가 자라고 얼굴이 영글어져 가면서도 늘 같은 표정과 같은 손가락. 



  그러다 언젠가는 국내를 넘어 다른 대륙으로의 여행을 가는 순간도 있었다. 2009년 봄, 유럽 대륙에 시골 촌뜨기가 발을 딛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는 유럽 여행 내내 다소 긴장되고 신나는 얼굴로 브이를 그리는 나에게 다른 포즈를 해 보라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브이.



  한국과는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순간순간을 담으려고 한 엄마와 아빠의 시선은 자꾸 날 브이 하게만 만들었다. 여행 말미에는 사진을 너무 찍어대는 통에 지쳐버려 웃지도 않고 손가락만 기계적으로 펼쳤다. 이제와 다시 그 사진을 보면 너무 웃기다. 사진 속 즐거운 건 내 손가락뿐이거든. 


  그땐 왜 이렇게 사진을 찍어댈까, 귀찮다. 하는 마음뿐이었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가 주문처럼 외우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부었다는 적금을 깼다는 말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냥 뭐가 깨졌나 보다 하는 생각. 멋진 성당이나 탑, 그림들보다 아침 조식에 먹었던 누텔라 잼 하나에 더 흥분했던 꼬맹이들은 한창 자란 후에도 그날의 피곤함과 맑은 하늘 아래서 뒹굴었던 유럽의 작은 공원을 종종 이야기한다. 별 것도 없는 짧은 시간에 넷이 잔디밭에 철퍽 앉아서는 초콜릿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아빠가 별안간 시작한 물구나무서기를 동생과 옆자리 파란 눈 외국인이 따라 하던 모습. 엄마와 아빠도 함께 맞아 그런 곳이 있었지, 하며 잠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커다란 결심이었는지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문득문득 마음이 묵직해진다. 알려주고 보여주고 싶었다는 엄마와 아빠의 다짐이 그때는 그렇게 커다란 것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모른 채로 돌아다니던 유럽의 길거리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종종 잠들었다가 눈뜨면 2009년의 5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다 알아버린 지금 간다면 훨씬 깊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5월엔 스위스를 떠올리곤 한다. '그림 같은 풍경'이 무엇인지 내 두 눈으로 선명하게 확인하고 온 때였다. 그런 결과를 보자면 때론 진가를 몰라도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저 품고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된다고. 단순히 남은 건 브이하고 있는 내 사진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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