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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pr 25. 2023

말해주면 선생님이 고칠게

고마워 가르쳐줘서

  "나 논술학원 싫어! 당장 끊어달라고 할 거야! 절대 안 올 거야!"


  처음 아이가 뱉은 말을 듣고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 안 되는데?! 6개월이나 결제했는데... 그리고 곧바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나... 선생님 맞아? 지금 수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가 글을 잘 쓰던 책을 많이 읽고 독후감을 열 편씩 뚝딱 쓰던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아이의 마음이었다. 


  그날 H는 들어오면서부터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저 오늘 집에 갈게요, 오늘은 수업 안 할게요, 라면서 괜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가방을 들었다 놨다 하고, 의자에 서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이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면 늘상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다소 무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라 몇 번 이야기하자 입을 쭉 내민 H는 교재에 글자 대신 낙서로 가득 채웠다. 내가 낙서를 보고 입을 떼자 곧바로 날 선 불만이 쏟아졌다.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은 늘 '싫어요', '몰라요'이기 때문에 그려려니 하지만 '당장 끊어달라고 할 거야'는 처음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속에서 무언가 욱, 치고 올라왔지만 애써 삼켜보며 H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가 싫은데? 선생님한테 말해줘 봐"


  H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객기 부리는 마음으로 학원 끊겠다며 난리를 피우면 혼나기만 혼났었지 누가 왜 그러냐 묻는 건 처음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H와 눈을 맞추고 재차 물었다. 대체 뭐가 싫으냐고, 왜 학원이 다니기 싫으냐고. 아이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안 하면 아무도 알 수가 없어. 만약에 선생님한테 말해주잖아? 그러면 원하는 대로 바꿔줄게. 선생님한테 다 말해. 선생님도 모르니까.  갑자기 진지하게 다가간 내가 당황스러웠는지 H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내가 가진 패를 다 내보였다. 정말 사실이었다. 나는 아는 게 없었다. 논술선생님이라는 일이 정해지자마자 여러 가지 공부를 했고, 모르는 건 언제나 물어보면 된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모르는 것도 알아야 물어보지, 내가 모르는 걸 모르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아 나 이거 수습하는 방법 모르는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이들에게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기. 그게 나의 최선의 무기였다. 아는 것도, 경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었다. 어차피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건 학부모도 아니고 본사 직원들도 아닌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아이들과 열심히 소통해야만 나도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이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원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친구들은 다 놀러 가는데 나는 계속 학원만 간다고. 초등학교 2학년이 울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리가.


  "그래 그럼 학원 끊어! 대신 울지 않고 왜 끊고 싶은지 엄마한테 직접 말하기, 어때?"


  가만히 어깨를 토닥이다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꼬셨다. 직접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안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에게 학원을 끊겠다거나 뭘 하기 싫다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 기억난다. 나의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런 말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처음이었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우는 학원이라는 말을 하면서 내가 도와주겠다 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연습하자고. 말하는 거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선생님이랑 여기서 공부하는 거 아니라 연습하는 거라고.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답도 없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내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내내 반응 없이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나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알아는 들은 걸까 알 수 없었다. 한참 떠들다 선생님이랑 약속하자 말 잘하기로, 하며 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아이가 냉큼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옳지! 하는 호쾌한 감탄사가 나왔다. 손가락 걸고 굳게 약속을 받아내고 난 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말려야 했다. 그리고 금세 H도 눈물 흘린 적 없다는 듯 밝아져선 와악! 소리를 질렀다. 나의 진심 어린 말을 알아줬을까?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날은 잘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으로 끝냈다. 다행히도 그 뒤로는 논술학원을 끊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대신,


  "선생님! 엄마한테 전화해 주세요! 저 영어학원 끊어달라고요!"


  하는 걸 보니 원체 학원이 싫은 아이이긴 했다. 


  경쟁을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커다란 경쟁의 판에 뛰어들었다. 이제껏 어린 게 최고라는 인식 아래에서 살았지만 내가 발 들인 곳은 경험이 최고더라.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장점이 없는 나에게 잘 버티고 네 성심성의껏 해라. 하는 말들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이렇게만 하라고 알려주거나 이런 것만 하지 말아라 하지, 그냥 네가 알아서 하라는데 어찌 기분이 좋겠느냐고. 그래서 난 솔직하기로 했다. 제가 잘 몰라요 알려주세요.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선물은 뭘 가지고 싶은지, 어떤 수업이 좋은지, 선생님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모두 말해줘, 선생님도 모르니까 다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가르쳐줘서 고마워. 이 교실에서 성장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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