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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Nov 11. 2023

여름, 멕시코시티

말이 안 통하는 진짜 해외여행

7월의 여름, 휴스턴은 하릴없이 뜨겁기만 하다. 드디어 찾아온 주말에도 재미있는 일이 절대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 도시를 우리는 떠나야만 했고, 어느새 우리는 멕시코시티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 있었다. 급하게 결정된 여행이었기에 미리 사전조사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오래된 도시의 거리를 걷기만 하더라도, 알찬 주말이 되지 않을까 했기에 속옷 한 벌과 여벌 옷 하나를 챙겨 샌들을 신고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훨씬 더 멕시코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다. 수도인 멕시코시티가 그러니 아마 칸쿤 같은 미국인 대상 휴양지를 제외하고는 멕시코 전역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에 가서 영어를 쓰기를 바라는 것도 우습지만, 이토록 세계화된 오늘날, 미국이란 슈퍼 파워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에서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거리의 젊은이들조차도 영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아했다. 오랜만에 과장된 손동작과 풍부한 표정을 동원해 가며 어디에 가면 우버를 탈 수 있는지 묻고 물건 가격을 사는 것은 조금 불편하고 너무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멕시코시티의 해발고도는 2,200미터. 한라산의 높이가 1,950미터니 남한에서 이보다 높은 곳이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인지 힝구와 나는 숨쉬기가 어렵고 머리가 무거웠다. 늘 건강을 자부하던 사람이 이런 대도시에서 고산병 증상을 호소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서늘한 공기와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을 맞으며 우리는 광화문 광장 격인 소칼로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광장 동쪽으로 눈에 띈 것은 아즈텍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의 노점이었다. 거리에 앉아 팔찌, 머리띠, 손가방 등의 알록달록 색이 쨍한 수공예품들을 팔고 계셨다.


“꽌토 퀘스타?” (¿Cuánto cuesta?)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할머니만큼 작고 조그마한 구슬로 만들어진 팔찌가 예뻐서 구글 번역기를 돌려 얼마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대답을 알아들을 리 없는 나는 대충 지폐와 동전을 섞어 건넸고, 할머니는 주름 많고 곱은 손으로 35페소를 가져가셨다. 자잘한 꽃들로 이루어진 2달러짜리 팔찌. 소 확 행이란 걸 오랜만에 느끼며 힝구에게 채워달라고 했다. 여리여리한 구슬들이 손목에 감겨있는 모습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소칼로 광장의 북쪽에는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있는데, 그 주변으로 신기한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한쪽에서는 아즈텍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민간요법인 듯 보이는 의료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샤먼 같은 사람이 정체 모를 마른풀에 불을 지펴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 향을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갖다 대며 주문을 외웠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만든 성당 양 옆에서 그들에 의해 밟힌 고대문명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찬찬히 지는 해를 바라보며 힝구와 나는 아레나 콜로세오로 향했다. 멕시코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레슬링, 루차리브레의 경기장이다. 온라인 관광 상품이나, 에어비엔비 현지 호스트를 통해 경기장에 가면 엄청 비싼 표 값(8만 원 정도)을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는 경기당일 발코니 티켓을 창구에서 구매해서 5천 원 정도로 활기가 넘치는 그곳의 에너지를 마음껏 누렸다. 루차리브레는 마스크를 쓴 레슬러들이 저마다의 배경과 스토리를 만들어 경기장에서 싸우는 일종의 공연이다. 응원하는 마스크맨의 승리에 환호하는 멕시코 사람들의 열기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누가 봐도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합을 맞춘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능수능란하면서도 실감 나게 연기를 펼쳤고, 어떤 선수는 영 어설펐다. 그 어설픔에서 경기가 사실은 공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걱정 없이 즐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수들이 링 위로 올라올 때마다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고 팬들이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에게 헤드락을 걸며 미국의 프로레슬링 쇼를 따라 하던 젊은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끌벅적한 그곳의 분위기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튿날, 일찍 눈을 뜬 우리는 조식을 먹고 바로 밖으로 향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차풀테팩 성은 버스를 한 번만 타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메트로 카드가 필요했는데, 메트로 카드는 지하철이나 특정 버스 정류장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특별하게도 지역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라 지하철 운행을 하지 않아 지하철 역의 입구가 다 막혀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우리는 헤매었고 결국 우버를 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 관광객처럼 돌아다니기보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는 여행자이고 싶었는데, 배고픔의 짜증이 섞인 힝구의 보챔에 내 여행의 로망은 점점 꺾여가니 결혼 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혼자여행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런 마음이 반영된 내 발걸음은 힝구보다 10걸음 앞섰고, 우리는 삼 십분 동안 따로 걸어 다녔다. 성에 출입할 수 있는 입장권을 사야 하는 시점이 와서야 힝구가 내민 손을 마지못해 잡으며 미적지근한 화해를 한 우리는 여행지에서 싸우지 말자는 의미로 뽀뽀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좋은 날씨에 우리는 미술관, 박물관들을 정처 없이 떠돌며 텍사스와 다른 일상을 보냈다. 호텔 밖만 나오면 걸을 수 있는 거리와 몇 달러만 내면 먹을 수 있는 타코. 거리의 악사가 세상 멋진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고,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유적지인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일정은 오래된 우체국에서 엽서를 써 보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미래의 나에게 가장 좋은 선물. 이번엔 힝구에게 사랑의 말을 담았다.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늘 곁에서 나를 잘 지켜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집주소를 쓰라고 해놨더니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마 아파트 호수를 안 쓴 것 같다고 고백하는 힝구. 결국 내 사랑 고백은 멕시코와 텍사스의 어느 한 우체국에서 수신인을 찾지 못한 채 쓸쓸하게 잊힐 테지만 결과물이 없다고 해서 내 행동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속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엽서를 대신에 직접 힝구에게 사랑한다고 귀에 속삭였다.

주소를 제대로 적지 않고 있는 힝구


꽉 잡은 손을 앞뒤로 열심히 흔들며 다닌 탓에 팔찌는 온 데 간데 없어지고, 혹시나 했던 엽서도 역시 도착하지 않아 멕시코에서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행의 기념품이 꼭 물질이어야 할 일인가?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는 우리에게 더 크고 천천히 다시 말해주는 친절한 사람들, 계속 먹었던 타코 때문에 통통해진 뱃살이 우리의 기념품이 되었다.

다음엔 스페인어를 더 공부해서 멕시코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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