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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Jan 26. 2024

부다페스트에서 발레공연을

‘원진’이 아니라 ‘오네긴’입니다

이번 부다페스트 여행 하이라이트는 오페라하우스에서 본 발레공연 Onegin이다.


Onegin은 지난 밀라노 여행 때 보지 못했던 공연이다. 오페라 하우스 자체만을 구경하는 입장료가 13달러고, 공연 관람료가 20달러면 당연히 공연과 극장내부를 함께 볼 수 있는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법. 합리적 소비를 위해 공연티켓을 사러 매표소에 갔지만 온라인에서 버젓이 남아있는 좌석을 확인했음에도 표를 파는 아저씨는 매진이라며 퉁명스럽게 응대했다. 약간의 인종차별을 느끼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극장 건물을 구경하는 데만 그쳐야 했던 밀라노 스칼라좌의 추억.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어쩌면, 표를 파는 아저씨는 인종차별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교양을 갖추지 못한 관광객에게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 문화를 향유하지 못하게 심술을 부린 “교양 차별”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원진이 아니라 오네긴이에요

왜냐면 내가 Onegin을 ‘원진‘이라고 읽었기 때문이다. “원진 표 두 개 주세요.” 지극히 미국적인 발음으로 말이다. 이 작품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의 소설 이자, 동명의 오페라 공연과 영화마저 있는 독일 슈투드가르트 발레단의 대표작을 “오네긴”이라고 읽었을 거다. 과거 나의 무식함에, 오늘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번 발레 관람 역시도 부다페스트 오페라 하우스 내부만 구경하는데 밀라노 보다 약 2배나 비싼 25달러라는 입장료를 내기 싫었던 나의 약간은 비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미국에서 부다페스트로 출발하기 전, 공연 예매를 위해 공식 홈페이지를 방문했지만 어째서인지 나와 남편(힝구)을 위한 2개의 좌석 선택이 불가능했다. 아직 자리가 좀 남아있으니, 공연장에 직접 가서 자리를 사기로 하고 공연 당일, 창구에 갔다.

“제가 온라인으로 예매를 하려고 했는데, 좌석이 블록으로 지정되더라고요.”

“해당 좌석은 박스석이라 4자리를 다 사셔야 합니다.”

블록이 지정되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4자리를 다 사는 건 좀 부담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힝구와 상의를 했다. 상의가 오래 걸려서인지 창구 직원이

“지금 사시면 30% 할인해 드려요.”라고 했고, 우리는 바로 ‘오케이’를 외쳤다.

발레 공연은 학교 다닐 때 무용채플과 호두까기 인형이 전부였던 내가 드라마 발레인 오네긴을 그것도 헝가리에서 보게 된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엔 멋지게 가기

나름 클래식 공연을 즐길 줄 아는 나는 한국에서도 종종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이나 피아노, 바이올린 공연에 가곤 했었다. 깔끔한 블랙 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를 갖춰 입는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매너를 갖춘 사회인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위해 온 부다페스트에 거추장스러운 원피스와 코트를 담은 캐리어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 최소한의 짐을 꾸려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방랑형 여행자인 나는 검은색 패딩 코트와 어느 날씨에도 신을 수 있는 군화 모양의 닥터마틴을 선택했다.


약간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빨간색 사틴 원피스를 입은 안내직원들이 우리를 발코니석으로 인도했다. 차림새 때문에 자격 없는 이들이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쭈뼜거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170달러를 주고 산 5번 방의 문을 열자 등받이와 앉는 곳이 빨간색 벨벳으로 이루어진 황금색 의자 2개와 보조의자 2개가 놓여있었다. 테라스 가까이에 다가가니 연하늘색 바탕에 통통한 아기천사들과 나체의 남녀들이 두둥실 떠다니는 천장화 아래로 은은한 주황색 조명을 반사하는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눈이 부셨다.

“오.. 이렇게 멋진 곳에 오다니.”

감동의 찬사가 입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서서히 입장하고 있는 관객들 중 다수는 공연장의 품격에 맞게 아름다운 실크 드레스와 정장 차림으로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여보. 우리 너무 막 입고 온 것 같다. 그치?”

한국이나 미국이었다면 크게 개의치 않을 의상이었지만 유럽의 한가운데서는 예절을 지키지 않고, 그곳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비칠 듯했다.

“다음엔 여행하더라도 멋진 옷 한 벌씩은 가지고 다니자.”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 같았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은 그렇게 다짐해 보았다.



발레 오네긴

발레 오네긴은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2번의 인터미션이 있었는데, 발레 공연이 생소한 까닭인지 관광객 몇몇은 인터미션 때 나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 발레라도 이야기를 미리 알고 공연을 보면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것 같다.

오네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총 4명이다. 천진난만한 올가와 그녀의 얌전하고 조용한 언니 타티아나, 올가의 약혼자 렌스키와 그의 친구 오네긴.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처음 보고 반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지만 자유분방한 오네긴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친구인 렌스키를 도발하기 위해 올가와 춤을 춘다. 렌스키는 그런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투 중 오네긴은 렌스키를 총으로 쏴 죽인다. 친구를 죽인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오네긴은 러시아 전역을 정처 없이 떠돌다 어느 파티에서 타티아나를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타티아나는 파티 추최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사랑을 고백하는 오네긴과 그에 대한 타티아나의 대답으로 발레는 마무리된다.  


한국 발레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발레리나 강수진의 은퇴작으로도 유명한 오네긴은 독일 슈투드가르트 발레단 존 크랑코가 안무를 맡아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일컬어진다. 몸으로 감정과 내면의 심리를 표현해 내는 댄서들을 보며 마지막 장면에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자동적으로 기립박수를 쳤다.

특히 발레는 그 춤의 특성상 모든 신체를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으로 단련시켜 만드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몸의 형태를 보여주는 장르기에 공연 내내 중력을 거스르는 댄서들의 몸짓에서 그간의 노력과 연습량, 압도적인 표현력이 보여주는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모든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떤 곡은 친숙하기도 했고,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를 보는 재미까지 있었다.



유럽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 관람


앞서 말했듯 한국에서도 다양한 장르의 예술에 관심이 많아 공연 예술 역시 많이 접한 나였지만, 이번 공연 관람은 단연 최고였다. 공연을 보는 오페라 하우스가 가진 역사와 아름다움에 감동한 데다 이 공연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사람들과 음악들이 만나고 어우러졌는지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스토리 라인을 만든 푸시킨과, 음악을 만든 차이코프스키, 안무를 만든 존 크랑코와 이를 실제로 실현한 댄서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까지. 공연 예술을 집대성한 그 공간과 그 시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등이 찌릿찌릿했다. 감동의 물결은 공연이 끝나고도 길이길이 남아 관객들은 끊임없이 박수를 보냈다. 거의 10번에 가까운 커튼콜이 있었고,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힝구는 마지막에 조용히 속삭였다.

“박수를 엄청 쳐서, 혈액순환이 되고, 소화도 다 됐어.”


박스석을 빠져나오는데도 여운은 지속되었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은 화려한 천장화 아래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타고 내려와 코트 보관소에서 자신의 외투를 받아 거리로 나섰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문을 열고 나오자 바깥공기는 안개로 감싸져 포근했다. 부다페스트 거리에 떠도는 밤안개는 발레에 이어지는 공연 같았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가기 전, 엄청난 박수를 친 덕분에 꺼진 배를 채우러 케밥 집에 들렀다.

“너무 멋진 공연이었어. 공연 속에 빠졌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야.”

맛있는 케밥을 우물거리며 여전히 공연의 감동에 빠져 쫑알쫑알 이야기를 하는 나를 힝구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부다페스트의 첫날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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