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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Jan 28. 2024

세체니 온천에서 동상 걸린 사람

겨울 노천탕에선 물속에 얼굴을 담그지 맙시다

“여보, 일어나. 6시야. 목욕 가야지.”


세체니 온천은 유럽에서 가장 큰 온천이기에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꼭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손꼽는다. 겨울에 야외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지지는 경험이란. 놓치고 싶지 않은 온천욕을 위해 우리는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버스를 기다리니 어릴 적, 할머니와 목욕탕에 갔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생 시절, 눈도 뜨지 못한 나와 내 동생에게 옷을 입혀가며 첫 물로 목욕을 해야 깨끗하다고 새벽 5시에 우리를 이끌던 할머니. 붐비지 않은 때, 깨끗한 물에 들어가고 싶은 나의 마음이 예전의 할머니가 되어 남편(힝구)을 이끌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껴 온천가는 버스 안


커뮤니티에는 온천이 충분히 뜨겁지 않고 더러워서 비추라는 의견도 종종 있었지만 우리가 간 아침 7시, 몇몇 현지인으로 보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만 빼곤 사람이 없는 온천에서 영하 2도의 추위 속, 38도 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았다. 문제는 너무 좋아서 한 시간 반 가량을 야외 풀장에 있다가 볼이 얼었다는 거다. 얼굴을 계속 물 밖에 내놔야 했거늘 바보 같은 우리는 얼굴을 물에 담갔다 뺐다 하며 물놀이를 했다. 결국 가벼운 동상에 걸린 나와 힝구는 여행 내내 벌겋게 달아올라 간지럽고 따끔거리는 얼굴을 하고 추운 부다페스트 거리를 누비게 됐다.


세체니 온천은 야외 풀장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실내의 다양한 풀장과 시설에도 놀라게 된다. 실내에선 유황의 비릿한 냄새가 더욱 강했다. 주로 현지의 어르신들이 실내 풀장에서 가벼운 몸풀기를 하며 온천욕을 즐기고 계셨다. 1913년 지어진 시설인 데다 물이 계속 닿아 조금은 낙후된 실내 온천의 물속에서 체조하는 노인들을 보고 있자니, 영화 Youth(유스)와 The cure for wellness(더 큐어)가 떠올랐다. 두 영화의 배경이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노약자의 휴식처인 온천이었기 때문일 거다. 유스는 온천에 온 두 노인들이 살아온 삶에 대해 돌이켜보고 여전히 방황하는 내용이었고, 더 큐어는 영생을 꿈꾸는 자들과 온천 운영자의 음모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둘 다 가볍지만은 않은 영화였다. 세체니의 실내 풀장은 그 분위기와 사람들 덕분에 마치 영화의 세트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이상하게 무거운 분위기 탓에 우리는 시설을 견학하러 온 학생처럼 한 바퀴를 쭉 둘러본 뒤 야외 풀장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고, 눈이 오기 시작했다. 눈을 맞으며 따뜻한 물 안에 있으니 상쾌하면서도 노곤한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일반 목욕탕이었다면 그 정도로 오래 물 안에 있지 못했을 텐데, 콧구멍 속으로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니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텔 체크아웃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몸을 닦고 거리로 나섰다. 펑펑 눈이 오는 거리에 목욕으로 빤질빤질해진 우리 둘이 있었다.

얼어붙은 얼굴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피부가 땅겨왔다.

“여보 스킨, 로션을 안 발라서 얼굴이 땅기나 봐. 얼른 호텔에 가서 샤워하고 바르자.”

동상에 걸린 줄도 모르는 부부는 손을 잡고 힘차게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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