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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Jan 01. 2024

떠나가는 내 사랑

사랑을 보내는 마음

운전을 하고 있는 내게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외할머니가 위독하셔서 가족 모두 안동으로 갈 거라고.

엄마와 아빠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둔 23일, 건강검진을 위해 대전 동생네 집에 와있었기에 나를 제외한 온 식구가 다 함께 안동으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다음날 아침,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9시에 나도 안동에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 동생들은 물론 서울에 있는 큰 외숙모까지 함께 모여 안동병원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기 위해서. 그야말로 때를 기다리는 대기조였다.


23일, 24일 이틀 연속 '임종면회'를 한 식구들은 할머니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한국에 도착한 그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오전 10시, 3주 만에 할머니를 마주했다.

노인병동에서는 여전히 코로나를 위험 전염병으로 간주했기에 자가키트 검사 후, 15분 동안만 할머니와의 면회가 주어졌다.

콧구멍을 깊이 쑤셔 알싸한 느낌이 뇌까지 전해진 후 면회 차례가 되기까지, 추측만 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조금은 겁이 났다.

그러나 일반병실에서 일인실로 옮겨질 정도로 할머니 상태가 위독하다는 식구들의 말과는 달리, 인인실에서의 할머니는 반짝이는 눈을 지그시 뜨며 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바라보셨다.

수빤이가 5월이면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 동글이가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라 큰 신혼집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웃어 보이기까지 하셨다.

생각보다 괜찮은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위독하시다면서 3주 전과 다름없는 할머니의 모습을 본 나는 괜히 먼 길을 온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와 다르다면, 산소호흡기를 찬 정도일 뿐.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기도 하셨고, 나와 식구들 모두를 알아보셨다.

하지만 안도의 마음은 잠시 뿐, 할머니의 여윈 모습은 내 마음은 울컥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있는 살집 있는 외할머니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린 할머니를 보기만 해도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자그마한 얼굴 옆에 바짝 붙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말했다.

"할머니, 너무 감사해요. 할머니가 사랑을 주신 덕분에 우리 손녀들 모두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있어요. 할머니 너무 사랑해요. 잊지 마세요."

사랑한다는 말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잡은 할머니의 손을 조물거렸다.


면회가 끝난 후, 30분 후에 돌아가실 수도, 일주일 뒤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 상황이니 언제까지 이렇게 병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큰외삼촌은 우리를 돌려보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본인이 연락을 할 테니 일상을 살아가라 말했다.

면회 직후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나는 26일,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공항버스 정류장을 향해 집을 나섰다.

춥다던 한국 날씨는 꽤나 온화했고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길을 걸었다. 아프실 텐데도 내가 갈 때만큼은 없는 힘을 짜 내어 웃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할머니가 고마웠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고 오늘은 비행기를 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나는 가던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하염없이 기다렸다. 뭔가를 딱히 할 수도 없었다. 초조함만이 마음을 그득 채울 뿐.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잊은 채 거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동생들이 하나 둘 퇴근해서 도착한 후, 정신이 조금씩 들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수건과 잠옷, 세면도구를 준비했다. 이불 3개도 챙겼다. 6년 전,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렀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저녁 9시 전화가 왔다. 아빠였다. 핸드폰 너머 아빠는 울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았던 그 소식. 할머니께서 가신 거다.

짐을 다 챙긴 채,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소식을 들은 우리 세 자매는 소리 없이 울었다. 서로에게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울었다.

나는 다시 아빠에게 전화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면 되는지, 어디로 가면 될지를 물었다.

아빠는 밤이 늦었고, 장례식장 사용 가능 여부도 확인 중에 있으니 아침이 되면 오라 했다. 짐을 모두 싸놓았기에 바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빠의 말을 듣기로 했다.


우리는 한 방에 모여,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영상들을 보면서 공유 폴더를 만들었다. 왜 우리가 할머니를 이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할머니와 쌓아온 우리의 추억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무엇이든 퍼다 주시는 분이셨고, 늘 우리를 예뻐하셨다. 똑똑한 데다 멋쟁이였고, 음식솜씨도 기가 막혔다. 인정이 많아 동네 사람들도 늘 칭찬했고, 우리를 한 번 혼내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그저 사랑이었다.

내가 쓴 많은 글들의 글감이 할머니였던 건 그만큼 할머니가 내 중심을 이루는 사랑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나흘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안동병원 장례식장 9 분향실에 마련되었다. 오전 10시쯤 동생들과 도착하니, 대기조였던 엄마, 아빠, 서울 숙모와, 안동에 사는 두 삼촌네도 이미 와 있었다. 하얀 국화 조화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장례 절차와 비용에 대한 안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몇 명 쓸 건지, 음식은 얼마나 시킬 건지, 슬픈 가운데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이 주어졌고, 그 덕분에 할머니의 죽음은 현실에서 조금 멀어졌던 것 같다.

염한 할머니를 마주할 때, 생명의 씨앗이 빠져나간 할머니의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그 몸을 만지며 또 한 번 슬픔이 온몸을 채웠다. 보고 있는 할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 아무 소용없는 몸에 사랑한다고 또 속삭이고 싶은 마음에 슬픔이 밀려왔다.  

조문객들이 찾아오고, 부의금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동분서주하다 보니 슬픔이 어느새 가시는 듯하다가도, 누군가가 울면 따라 울게 되더라. 덩그러니 놓여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다 보면 눈물이 나고, 잠을 자기 위해 조문객들이 물러난 식당 바닥을 닦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이별은 불쑥불쑥 현실의 가면을 쓰고 고개를 내미는 말 안 듣는 아이 같았다.

이틀 동안은 할머니 생각에 슬펐다가, 돌발행동을 하는 조문객 때문에 웃기도 했다가 부의금을 세고, 각종 비용들을 계산하고 처리하느라 상주들 모두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거다.  


발인 전, 문상객들이 가고 난 후 조용한 밤. 할머니가 뿌려놓은 씨들이 조용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엄마, 삼촌들, 나와 동생들, 사촌들, 조카, 아빠와 숙모들까지. 할머니의 마음이 가 닿은 사람들이 한가득 그녀를 보내는 길에 함께 하고 있었다. 위안이 되고 큰 힘이 되는 나와 그녀의 연결고리들이 촘촘히 장례식장을 채우며 할머니를 회상했다. ‘그때는 이러셨는데.’ ‘고생만 너무 하셨지.’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셨어.’ 그리운 말이

오고 갔다.

발인 날 아침은 새벽 4시 30분부터 분주했다. 상식을 올리고, 발인제를 지내고 화장장으로 향했다. 돌아가시고 난 후,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게 부질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절차라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고 따라 했다.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온 할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보고 또 오열했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할머니가 아닌 유골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백색 무궁화 도자기에 담겨 호국원으로 모셔졌다.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엄마와 아빠에게 임종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고 했다. 오전 10시 면회 때 혈압이 20-40이었고, 잔뜩 아픈 표정을 짓던 할머니를 보며 엄마, 아빠는 마지막을 예상했다고 했다. 오후 8시 면회에서 어른들이 모두 입회한 가운데 10으로 떨어진 할머니의 혈압을 확인하고 산소호흡기를 제거한 채 모두 손을 잡고 임종을 지켰다고 했다. 고통이 없는 편안한 곳으로 할머니를 보내드린 것이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고 했다. 부드럽게 뜬 눈을 아빠가 감겨드렸단다.  


발인 후, 식구들이 모두 모여 할머니가 생전 사시던 외갓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할머니가 없는 외갓집은 영 춥고 낯설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실 때만 해도,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앞으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건 상상이 안된다.

친척들이 다 가고, 엄마, 아빠, 나와 동생들, 우리 식구들은 하룻밤을 더 외갓집에서 보냈다. 하루를 더 보내며 할머니 없는 외갓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했다.  

지난 면회 후 쓴 편지를 직접 보여드리지 못해, 발인 후 불에 태워 전했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고, 내일은 미국으로 떠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보니 목소리가 좋지 않다. 잔뜩 울어 잠긴 목소리다. 집에 오니 이제야 할머니가 떠난 게 실감이 난단다.

유별시레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큰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힘들어했고, 지금도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슬픔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기에 힘들어 하는 엄마를 나는 그저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엄마 몫의 슬픔처럼 나도 내 몫의 슬픔을 감당해야 하기에.

엄마를 닮아 나 역시도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고 상실감이 크지만 아직 할머니가 가셨다는 게 크게 실감나지 않는다.


내 마음에,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내 마음속에 닻을 내려 보내줄 수가 없네요. 부디 내 마음속에선 떠나지 마세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고 많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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