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이라도 다 같은 계란은 아니다
아빠의 꼬꼬가 알을 낳았다.
아빠는 올해 4월부터 청란을 받아먹어보겠다고 자재창고 뒤에 작은 닭장을 지어 병아리 12마리를 키웠다. 사실 계란을 먹겠다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경기가 좋지 않아 공사가 없는 날들이 지속되며, 아빠에게는 소일거리가 필요했고, 돌봄을 줄 수 있는 동물을 키우고 그에 대한 작은 보상을 계란으로 얻고자 닭을 키운 거다.
내가 닭들을 처음 보았을 땐 애들이 부화한 지 한 달 반쯤 되었을 때였다. 그때 꼬꼬들은 다리가 길고 늘씬한 맵씨로 제법 우아한 닭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삐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들이 애기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를 놀리기 바빴다. “계란 받아먹으려면 암탉이어야 하는데, 얘들 다 벼슬이 쭈뼛 나온 게 수탉이야. 아빠는 수탉만 여덟 마리를 키우고 있는 거야 ㅋㅋㅋ.” 수탉들은 알을 낳지도 못하고 사료만 축내는 존재다. 스티븐연이 주연한 영화 ‘미나리’에서는 막 미국에 이민을 온 한국인 이민자 부부가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 병아리 감별사들은 병아리들의 똥꼬를 보고 암수를 구분해 수평아리를 기계를 던지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수평아리들은 기계에서 뼈째 갈려 너겟으로 만들어진다.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부화하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병아리의 생애가 애처롭고 인간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 집 수탉들도 살이 야들야들할 때까지 키워졌다 언젠가 도축당할 운명이었다. 아빠의 작은 농장을 보며 공장형 축산업의 현실과 생명의 존엄성, 인간의 잔인함이 모두 느껴졌다. 가축을 키운다는 건 그만큼 책임질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한편으론 경제성까지 따져야 하는 일이었다. 애완동물로 닭을 키운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빠는 경제성을 따지고 닭들을 키운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병아리를 사고, 닭장을 짓고, 사료를 산다고 60만 원을 들였다. 계란을 60판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아빠의 농장은 애정을 쏟고 시간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던 아빠의 비경제적인 선택이었다.
아빠는 정성스레 닭들을 돌봤다. 집에서 나는 과일 껍질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 매일 닭에게 대령했다. 아침이면 닭장에 가서 애들을 풀어주고, 저녁에는 몰아넣어 닭장에 문단속을 해줬다. 서로 생김새는 다르지만, 매일 보면 서로에게 애틋한 관계가 되나 보다. 닭들은 아빠가 가면 쪼로록 나와서 그 주위를 맴돌았고, 아빠 역시 자신이 가져온 빵부스러기와 과일조각들을 먹는 꼬꼬들을 쳐다봤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여름과 함께 온 장마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란 꼬꼬들은 한여름 홍수로 인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저지대의 자재창고엔 1미터가 넘는 물이 들어차, 꼬꼬들은 닭장 한가운데 걸쳐져 있는 나무 막대기 위에서 먹이도 없이 12시간을 견뎌냈다. 엄마는 꿋꿋이 어려움을 겪고 이겨낸 닭들이 안쓰럽고 열악한 환경에 살게 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엄마는 세상 모든 미물에 안타까움을 가지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우리 부부가 여름휴가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남편은 말로만 듣던 아빠의 닭장을 시찰했다. 홍수가 나고 이틀 뒤였다. 남편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진 닭장에서 검은색 닭 한 마리가 축 처져 죽어있는 걸 발견하고 아빠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말했다. 결국 한 마리가 수해의 스트레스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장마로 굶주린 들짐승들이 잠시 풀어놓은 닭들을 잡아 뜯어 물어 죽여 버렸다. 아빠는 닭들의 널브러진 시체를 보며 속상한 마음을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로 생생히 전달했다. 정성과 사랑을 쏟은 존재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건, 아빠도 처음 겪어보는 아픔이었을 거다. 아빠의 목소리가 달라진 건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대부분의 닭을 잃고 단 두 마리만 남아 닭장을 지키고 있던 그때 절뚝거리며 다리를 저는 닭 한 마리와 엉덩이를 물려 피투성이가 된 닭 두 마리가 아빠를 향해 걸어왔다. 아빠는 그 반가운 마음을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온 군인을 보는 듯했다고 했다. "상이용사가 돌아왔다고!!!"
그리고 어제, 엄마가 가족 단체 카톡방에 사진을 보내왔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청색 빛을 띤 알이었다.
'오만 시련을 겪고 꼬꼬가 첫 알을 낳아서 신기하고 마음이 알알.' 사진과 함께 엄마의 메시지가 함께 왔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은 짧은 카톡이었다. 병아리로 태어나 짧았던 생애 속 함께 지내던 형제들을 잃고, 수해에 고생한 꼬꼬가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세상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엄마는 계란이 따뜻하다고 했다.
"진아, 이걸 어떻게 하면 좋노. 아이참, 마음이 이상해."
엄마는 그 알을 들고 집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하지만 결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도 가끔 아빠와 함께 닭장에 가서 닭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아빠를 보곤 했다. '저러니 어떻게 꼬꼬들에게 정이 안 가겠냐고.' 엄마는 한참 닭을 보고 앉아있는 아빠를 보며 함께 꼬꼬들에 대한 정을 키웠다. 어쩌다 보니 남은 네 마리 꼬꼬들은 우리 식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최초로 한 마리가 알을 낳고 난 이후 나머지 세 마리도 알을 낳기 시작했다. 궁뎅이 물린 녀석 한 마리만 수탉이고 나머지 셋은 암탉이었다. 아빠는 농담으로 말하곤 했다. '저놈 궁뎅이 물려서 수탉 구실 못한다. 유정란은 아닐 거야.'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어느덧 달걀은 5개가 되었다. 아빠는 닭이 낳은 달걀을 하나씩 계속 집에 가져왔고, 차곡차곡 냉장고에 쌓았지만 결코 먹지는 못했다. 엄마 역시 마음이 너무 이상하다며 방금 낳은 따끈한 달걀은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알을 받아먹겠다고 키운 닭의 계란은 먹는 사람 없는 채 쌓여만 갔고, 우리 집에서 가장 냉정하고 닭들의 생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할머니가 첫 달걀을 깨는 사람이 되었다. '집에 가니깐 할머니가 두 알 드셨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아빠가 닭을 키우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계셨다. 그러니 닭도 달걀도, 그녀에겐 큰 의미 없는 재산이자 식량 정도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원래 매정하고 까칠한 성품으로 동네에까지 소문이 난 분이라 그런 이야기를 알았다 한들 할머니는 계란을 드셨을게 분명하다. 그렇게 아빠의 꼬꼬가 처음 낳은 달걀은 할머니가 냠냠 드시고 사라져 버렸다.
우리 부부 역시 코스트코에서 24개짜리 계란 한 판을 사면 2-3주 만에 뚝딱 먹어치운다. 식료품점에서 사는 계란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식재료로 나의 식탁에도 늘 오르지만, 아빠가 기른 꼬꼬가 낳은 계란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치열하게 생존해 온 꼬꼬들의 새끼 같은 느낌. 그래서 품고 다시 키워야만 할 것 같은 생명의 느낌이다.
사람과 동물사이, 아니 사람과 어떤 무언가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으로 기존의 통념과 다른 관계가 되어버린다. 어린 왕자에게 자신의 장미가 특별했던 이유는 매일 물을 주고 들여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 크게 와닿지 않은 그 이야기의 진짜 뜻을 이제는 알겠다. 매일 먹던 계란도 아빠가 기른 꼬꼬가 낳은 계란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걸. 사람마다 저마다 세상을 볼 때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단 걸. 그게 한 사람이 보내고 쌓아온 시간과 경험 때문이란 걸. 이제는 조금 알겠다. 아빠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꼬꼬와 나 역시도 미묘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청란은 아마도 당분간 할머니만의 보양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