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담 조셉 Nov 08. 2020

그땐 다 어려웠지 (2)

나의 찬란한 20대를 함께 한 강아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한 친구가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있다.

아침 자율 시간 내내 엎드려 있던 친구가 점심때 즈음이 돼서야 얼굴을 들었다. 밤새도록 운 흔적이 영력 했다.

집안에 누가 갑자기 돌아가셨나?? 

".....밤 사이에 미키가 죽었어."

"미키가.... 누고?"

"우리 집 강아지! "

"........?"

반려견을 떠나보냈다는 친구의 답변에 나는 피식 콧웃음이 났다. 심각한 표정의 친구 얼굴을 보면서 나는 강아지가 죽은 게 그렇게 슬픈 일일까 감정이입이 잘 안되었다.

그땐 몰랐다. 

그게 그리도 가슴 후벼 파는 일이었던 줄은.




나도 반려견을 하늘나라로 보낸 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2017년 첫아들을 품에 안고 그 아기가 한 달 즈음되었을 때 한국에서 14년 정도 키우던 콩쥐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산후 우울증이었던 내게 엄마는 콩쥐가 죽었다는 말을 바로 하지 않았다. 아이를 보느라 엄마와 나는 한 시간씩 교대로 산책을 다녀오곤 했는데 어느 날은 이상하리 마치 엄마의 산책이 다소 길어지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이상하게 뭘 감추려는지 날 보는 것을 회피하고는 얼핏 봐도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1시간 정도의 추궁 끝에,


콩쥐가 죽었단다. 아빠가 병원 데려갔더니
노견이라 수술해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해서 그냥 안 아프게
편안하게 보내줬단다. 우리 콩쥐가 갔단다, 그래...


나는 그날 정말 목놓아 3시간은 울었다. 산후우울증도 우울증이지만 그날은 진짜 꺼이꺼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울었다. 두 모녀가 갑자기 넋 놓고 울음을 터뜨리자 우리 남편은 어리둥절 무슨 일인가 했다고. 

아빠의 사업 부도 이후에 거의 10여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고 오빠와 나는 각각 장가 시집을 가고 그리고서 마치 제할일을 다한거 같다는 양 콩쥐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풋풋한 20대 내 젊음을 함께 해준 강아지

30대인 내게 지금은 금쪽같은 두 아들이 있지만 젊은 날엔 내 곁에 콩쥐가 있었다.

영주동 이모집 근처 세탁소에서 태어났다는 콩쥐는 4형제 중에서도 제일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귀여웠다. 사연이 있어 4번의 파양을 거치고서야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된 콩쥐는 전 주인이 어찌했는지 몰라도 꼬리 끝이 꺾여있고 배변 훈련 때 많이 혼을 내었는지 신문지 위에 볼일을 보면 신문지를 돌돌 공처럼 마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아이 었다.

내 손에 든 고구마를 바라보는 콩쥐


내 나이 19살 아빠의 사업이 하루아침에 정리가 되고 우리 가족이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마친 후 인연처럼 콩쥐가 집에 왔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집안 상황 그리고 대학생 아들&딸 - 엄마 아빠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을까. 집안 온 구석구석을 하얀 솜뭉치 마냥 돌아다니는 콩쥐 녀석은 단연 우리 가족의 중요 화두였다. 냉랭한 집안 분위기에도 콩쥐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내 학비 벌기 위해서 과외를 서너 개는 기본으로 했다.

부모님은 오빠의 학비를 내고 나면 내 학비를 내어줄 여분의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스무 살부터 내가 벌어서 살았다. 그게 억울하지도 그리고 애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없다. 20대, 내게 남은 거라곤 튼튼한 몸둥아리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게, 그리고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게 그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11시쯤 과외를 두서너 군대를 돌고 집에 돌아오면 콩쥐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광안리 산책을 나간다. 괜스레 폼 잡느라 맥주가 먹고 싶은 날에는 편의점에서 맥주캔 하나 사서 파도 소리를 안주삼아 콩쥐를 안고 앉아 있으면 혼자 하는 술맛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과외한다고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인지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그 시간이 그냥 좋았다. 

과외비로 받는 돈에서 가장 먼저 콩쥐의 사료와 간식을 샀다. 내게 수중에 3만 원 - 5만 원이 귀할 때지만 콩쥐한테 드는 비용은 그저 아깝지 않았다. 그저 기쁨이었다. 우리 집에 올 때부터 귀에 염증이 있어서 귀를 펄럭거릴 때마다 쾌쾌한 된장 묵은 냄새가 나던 콩쥐는 정기적인 치료를 마치고 나서야 냄새가 좀 가셨다.  

그렇게 오매불망 나는 콩쥐와 매일 붙어 다녔다. 

우리 엄마가 내게 늘 읊어대던 18번이,


딸아, 그 시간에 남자 친구나 알아봐라.
남자 친구한테 쏟아야 될 정성을 강아지한테 쏟고 있어서 될 일이가 지금!




우리는 두 번의 이사를 더 했고 콩쥐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마지막 경성대 뒷길로 이사 간 집은 누수가 잘 안되는지 방 한구석이 곰팡이 냄새가 엄청났다. 겨울이면 외풍이 엄청나서 보일러를 때어도 한방에 다 같이 잠을 자야 그나마 온기가 돌았다. 그리고 콩쥐를 안고 자면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집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 사이로 콩쥐는 매일 길고양이 사냥을 나갔다. 차 밑에 숨어있는 고양이 쫒느라 하얀 털 등위에 일자로 검은 오일 자국을 달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수였다. 

사업 부도가 나고 적적한 아빠를 위로했던 것도 콩쥐였다. 아빠는 콩쥐를 안고 안 다닌 데가 없다고 했다. 황령산 꼭대기며 이기대며 콩쥐는 이미 아빠와 숱하게 그 길을 다녔는지 그 일대는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콩쥐와 산택을 나갈 때에도 이미 자기가 길을 안내하듯 나를 리드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내가 독일로 가게 되었다. '독일, 독일' 꿈에서도 외고 다니던 내가 드디어 독일에 인턴 자리가 생겨 독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가고 나면 콩쥐가 눈앞에 삼삼하게 아른거릴 거 같았다. 콩쥐는 무엇인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케리어 위에 한참을 뭉게고 앉아 있곤 했다. 내가 가고 난 이후에도 엄마는 못내 그리워할 콩쥐를 위해 내 옷가지를 콩쥐 자는 쿠션 위에 두곤 했다고. 


독일 인턴 3개월을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원하던 독일에서 취직을 하게 됐다. 일단 경제적으로 나는 독립을 해서 좋았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도 진정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서 기뻤다. 비록 부모님께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용돈을 드릴 수는 없었어도 그래도 매해 엄마나 아빠를 독일로 모셔서 오스트리아, 이태리 등 유럽 여행을 함께 다녔다. 


그리고 잠시 잊었다. 

멀다는 이유로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나도 느지막하게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한국에는 1년에 한 번씩 들어가곤 했지만 하얗고 털 빛깔 곱던 콩쥐 털이 나이가 드는지 윤기가 덜하고 이도 하나 둘 빠지고 - 콩쥐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한국에는 휴가차 길게는 2주 남짓이어서 보고 싶은 친구들 만나기 바쁘고 하다 보니 콩쥐와는 산책다운 산책 한 번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2017년. 

12월 우리 아기를 데리고 한국을 가게 되면 콩쥐 할머니에게 아들 얼굴을 보여줘야지 생각했다.  

내가 아기를 낳았다고. 

내가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고 말해주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계획을 5개월 앞두고 콩쥐가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에 엄마를 보내고 홀로 있던 아빠는 늘 다니던 등산로 볕이 잘 드는 곳에 콩쥐를 묻어주었다고 했다. 


보고 싶은 콩쥐야, 

하늘나라에서 잘 살고 있니?

고마워, 내 20대를 함께 해줘서.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와주어서. 

니가 있어서 난 내 20대가 우울하지 않게 이 모든 것을 잘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거 같아. 고마워 콩쥐야. 

작가의 이전글 그땐 다 어려웠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