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우리 가족
IMF 가 휩쓸고 간 자리, 우리 가족에게 남긴 상처 그리고 회복기까지.
이번 이야기는 오랫동안 적을까 말까 망설였던 주제였다. IMF 외환위기 대한민국 모든 가정이 어려웠고 우리 집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매번 글을 업로드하고 나면 핸드폰 기능이 익숙지 않으시는 부모님께 링크를 함께 보내드리곤 하는데 이 글을 읽으시고 부디 부모님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마 이 집을 조만간 정리해야 할 거야.
사업이 넘어가서 다 정리해야 된다.
사실 IMF 가 터지고 대한민국 안에 어렵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었겠냐만 우리 집도 거기서 예외랄 수 없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빠는 다니던 은행의 권고로 명예퇴직을 하시게 됐고 그때 받은 퇴직금으로 아는 분의 사업을 인수해서 어렵사리 일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모두가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아빠는 그래도 꼬박꼬박 엄마에게 월급을 건네주었다. 뒤늦게 안거지만 그때 아빠가 사업을 인수할 때는 이미 힘들어질 때로 힘들어진 상황이라 어떻게 했어도 잘 운영이 안될 수밖에 없던 백지수표 같은 거였다.
근데 어린 내가 느끼기에 아빠가 은행원이었을 때의 엄마에게 건네는 월급봉투와 다르게 사업을 시작하고서 매달 받는 월급봉투는 뭔가 모를 울분 같은 게 느껴졌다. 돈뭉치가 든 하얀 봉투가 아빠가 어려운 IMF 속에서 어딘가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마련한 돈인 거 같아 느껴졌다. 그럼에도 사업이 어느 정도는 잘 되는지 고 1 무렵, 아빠 영업차 한대가 늘어 집에는 엄마 아빠 차를 포함한 총 3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골프채의 개수가 늘어가는 걸 보면서 우리 집은 별 탈 없이 잘 살겠구나 했다.
나중에 집이 다 정리가 되고 나서 엄마는 내게,
그땐 울고 슬퍼할 정신이 없었다.
니네 둘이 대학만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맨날 기도했다.
학업이 중간이라도 엎어질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지.
집을 다시 회복하고 말고는 그다음 문제였지.
넋 놓고 있을 시간이란 게 없었다, 그땐.
학교 생활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침마다 봉고를 타고 가던 등굣길은 이제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운동삼아 잘된 일이지 뭐. 아침에는 알람을 울리기 5분 전에 항상 눈이 떠졌다. 그 전에는 엄마가 아침마다 오빠 도시락 싸는 일을 도와달라며 나를 깨워야 했다면 지금은 혼자 일어날 수 있는 내가 왠지 모르게 대견했다.
나는 학교에서 급식 담당을 맡게 됐다. 급식 담당 도우미로 일을 하면 급식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에 학교에서 점심/저녁 친구들의 급식을 도왔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이 돌았는지 내가 원룸에 혼자 사는 게 반 친구들에게 알려지면서 어떤 친구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내가 부럽다는 얘기를 떠들어댔다. 우리 집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그 친구는 순진한 건지 고약한 건지 모를 얼굴을 내게 들이밀며 물어보았다.
그럼 당연하지. 축구경기도 혼자 보고 얼마나 좋은지 아나.
바야흐로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다.
6월 월드컵 경기가 한창 뜨거울 때 이모부가 세상을 떠나셨다.
호텔에서 정원사로 일하시던 이모부는 6월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그리고 이틀이 지나 유명을 달리하셨다. 이모네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오빠와 내가 거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고 이모부는 그러니 내게 아빠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이모부가 쓰러지기 이틀 전 나는 이모부와 '한국-포르투갈'전 내기를 했고 한국이 이길 것 같다는 나의 이야기에 이모부는 내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약속을 하셨다.
한국- 포르투갈 전을 마치고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이모집에 전화를 하였다. 이상하게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이모부가 쓰러져서 봉생병원에 있다.
지금 의식이 없단다.
그리고 이틀 뒤, 엄마는 검은 옷을 챙겨 입고 오라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얼마 전까지 웃으며 통화하던 이모부는 사진 속에 남아서 온화한 미소를 띠며 나를 보고 있다. 이모부가 만들어 주던 맛난 떡볶이도, 아침마다 큰 배를 부여잡고 완창 하시던 성가 노래도, 시시콜콜한 농담도,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곱슬한 하얀 머리에 풍채 좋은 모습도 이젠 없다.
홀로 남은 이모는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데 영안실에서는 한없이 더 작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첫사랑으로 만나 평생을 50여 년을 같이해오던 짝꿍을 잃은 이모는 너무 울어서 나중에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모가 사랑하는 하느님께 '이 세상 나 혼자 밖에 없는데 그 사람을 그렇게 일찍 곁으로 데리고 가셨어야만 했냐.' 목놓아 물어보았다고 했다. 이모는 그 이후에 하느님께 그 대답을 들었을까?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나중에는 눈물이 흐르다 못해 더 이상 남은 눈물이 없다는 걸 난 그때 깨달았다.
가슴 한켠이 먹먹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제발. 이게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