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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Nov 04. 2020

그땐 다 어려웠지 (1)

IMF 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우리 가족

IMF 가 휩쓸고 간 자리, 우리 가족에게 남긴 상처 그리고 회복기까지.
이번 이야기는 오랫동안 적을까 말까 망설였던 주제였다. IMF 외환위기 대한민국 모든 가정이 어려웠고 우리 집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매번 글을 업로드하고 나면 핸드폰 기능이 익숙지 않으시는 부모님께 링크를 함께 보내드리곤 하는데 이 글을 읽으시고 부디 부모님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2 겨울 방학, 고3을 앞두고 집에 긴장감이 돌았다. 

2살 터울인 오빠는 일치감치 서울로 대학을 가고 집에 덩그러니 아빠, 엄마 그리고 나만 남아 있었다. 

우당탕....

베란다로 가는 길에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다. 의식을 잃으시진 않았지만 팔다리가 뻗뻗하게 굳어서 엄마와 내가 한창 팔다리를 주무르고 바늘로 아빠 손을 일일이 따고 나서야 아빠는 좀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빠의 무거운 한마디,


아마 이 집을 조만간 정리해야 할 거야.
사업이 넘어가서 다 정리해야 된다. 



사실 IMF 가 터지고 대한민국 안에 어렵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었겠냐만 우리 집도 거기서 예외랄 수 없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빠는 다니던 은행의 권고로 명예퇴직을 하시게 됐고 그때 받은 퇴직금으로 아는 분의 사업을 인수해서 어렵사리 일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모두가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아빠는 그래도 꼬박꼬박 엄마에게 월급을 건네주었다. 뒤늦게 안거지만 그때 아빠가 사업을 인수할 때는 이미 힘들어질 때로 힘들어진 상황이라 어떻게 했어도 잘 운영이 안될 수밖에 없던 백지수표 같은 거였다. 


근데 어린 내가 느끼기에 아빠가 은행원이었을 때의 엄마에게 건네는 월급봉투와 다르게 사업을 시작하고서 매달 받는 월급봉투는 뭔가 모를 울분 같은 게 느껴졌다. 돈뭉치가 든 하얀 봉투가 아빠가 어려운 IMF 속에서 어딘가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마련한 돈인 거 같아 느껴졌다. 그럼에도 사업이 어느 정도는 잘 되는지 고 1 무렵, 아빠 영업차 한대가 늘어 집에는 엄마 아빠 차를 포함한 총 3대의 자동차가 있었고 골프채의 개수가 늘어가는 걸 보면서 우리 집은 별 탈 없이 잘 살겠구나 했다.

그러고서 2년 후, 고2 겨울 우리는 쫓기듯이 이사를 해야 했다. 

사업이 이미 기울어지고 마지막 정리 절차만 남았을 때 아빠는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아빠는 백방으로 사업 부도를 막고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엄마는 집 그리고 집에 있던 3대의 차도 헐값에 다 처분해버렸다. 집 한편에 덩그러니 자리를 꾀차고 있던 골프채는 진작에 아는 지인에게 팔아넘겼다. 

10여 년간 살던 집을 떠나야 한다. 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집.

6층 꼭대기에 있던 우리 집은 아파트 내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일 훈련하는 거처럼 오르락내리락 다녀야 했다. 엄마가 폐품을 버리라고 한가득 종이 상자를 주면 그걸 버리러 갔다 오는 게 일이었다. 여기서 유치원을 다녔고 동네 친구들을 사귀고 온 동네를 활발하게 뛰어다녔으며 무수하게 무릎이 까지고 피나고. 그러는 동안 아빠가 차를 두 번 바꿨고 나의 사춘기가 지나갔다. 

등 굽은 쌀가게 아저씨, 농담이 재미있는 약국 아저씨, 동네 조그만 빵집 가게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로 탈바꿈하기까지 등 내가 이렇게 커가는 만큼 오랫동안 동네가 모습이 바뀌는 걸 지켜보던 난데. 

이젠 여길 떠나야 한다. 

 

이삿짐 준비는 엄마의 계획하에 착착 준비가 되었다. 엄마는 마치 그런 일을 이미 해봤던 사람처럼 담담하게 정리를 해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당장에 대학생 아이들 둘 학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고민이 많았을 테지만 엄마는 내 앞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단단하게 굳어있는 엄마 표정은 이 사태가 본인도 엄두가 안 날태지만 비장하리 마치 태연했다. 

나중에 집이 다 정리가 되고 나서 엄마는 내게, 

그땐 울고 슬퍼할 정신이 없었다.
니네 둘이 대학만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맨날 기도했다.
학업이 중간이라도 엎어질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지.
집을 다시 회복하고 말고는 그다음 문제였지. 
넋 놓고 있을 시간이란 게 없었다, 그땐.




아빠는 할머니 댁으로, 짐은 이모 댁으로 그리고 나와 엄마는 부경대 근처 원룸으로 거처가 정해졌다. 7평 남짓의 작은 원룸은 별 살림살이가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가득 찼다. 추운 겨울, 원룸은 그래도 다행히 따뜻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다음 날로 팔을 걷어 부치고 식당에 설거지를 하러 나가셨다. 저녁에 돌아온 엄마는 얼굴이 기진맥진이었다. 하루 종일 고된 설거지로 엄마 팔에 벌겋게 일어난 습진을 보며 나는 우리 집이 나락으로 떨어졌음을 실감해야 했다. 조용히 자고 있는 엄마 팔에 크림을 발라주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고 왜 이렇게 비참하게 내팽개져버렸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학가 근처에 있던 원룸은 여러모로 고민을 잊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좁은 원룸을 박차고 나가면 번화가의 네온사인이 화려하다. 내 마음은 어두운 암흑인데 여긴 아주 천국이 따로 없군. 


학교 생활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침마다 봉고를 타고 가던 등굣길은 이제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운동삼아 잘된 일이지 뭐. 아침에는 알람을 울리기 5분 전에 항상 눈이 떠졌다. 그 전에는 엄마가 아침마다 오빠 도시락 싸는 일을 도와달라며 나를 깨워야 했다면 지금은 혼자 일어날 수 있는 내가 왠지 모르게 대견했다. 

나는 학교에서 급식 담당을 맡게 됐다. 급식 담당 도우미로 일을 하면 급식비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에 학교에서 점심/저녁 친구들의 급식을 도왔다. 그런데 어떻게 소문이 돌았는지 내가 원룸에 혼자 사는 게 반 친구들에게 알려지면서 어떤 친구가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내가 부럽다는 얘기를 떠들어댔다. 우리 집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그 친구는 순진한 건지 고약한 건지 모를 얼굴을 내게 들이밀며 물어보았다. 


그럼 당연하지. 축구경기도 혼자 보고 얼마나 좋은지 아나. 


바야흐로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다. 

6월 월드컵 경기가 한창 뜨거울 때 이모부가 세상을 떠나셨다. 

호텔에서 정원사로 일하시던 이모부는 6월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그리고 이틀이 지나 유명을 달리하셨다. 이모네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오빠와 내가 거의 자식이나 매한가지였고 이모부는 그러니 내게 아빠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이모부가 쓰러지기 이틀 전 나는 이모부와 '한국-포르투갈'전 내기를 했고 한국이 이길 것 같다는 나의 이야기에 이모부는 내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약속을 하셨다. 

한국- 포르투갈 전을 마치고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이모집에 전화를 하였다. 이상하게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이모부가 쓰러져서 봉생병원에 있다.
지금 의식이 없단다.
 

그리고 이틀 뒤, 엄마는 검은 옷을 챙겨 입고 오라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얼마 전까지 웃으며 통화하던 이모부는 사진 속에 남아서 온화한 미소를 띠며 나를 보고 있다. 이모부가 만들어 주던 맛난 떡볶이도, 아침마다 큰 배를 부여잡고 완창 하시던 성가 노래도, 시시콜콜한 농담도,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곱슬한 하얀 머리에 풍채 좋은 모습도 이젠 없다. 


홀로 남은 이모는 안 그래도 체구가 작은데 영안실에서는 한없이 더 작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첫사랑으로 만나 평생을 50여 년을 같이해오던 짝꿍을 잃은 이모는 너무 울어서 나중에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이모가 사랑하는 하느님께 '이 세상 나 혼자 밖에 없는데 그 사람을 그렇게 일찍 곁으로 데리고 가셨어야만 했냐.' 목놓아 물어보았다고 했다. 이모는 그 이후에 하느님께 그 대답을 들었을까?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나중에는 눈물이 흐르다 못해 더 이상 남은 눈물이 없다는 걸 난 그때 깨달았다. 

가슴 한켠이 먹먹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제발. 이게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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