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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Aug 05. 2020

출산, 그 영광의 자국들 - 튼튼이 출산기

 아가야, 나도 이 모든게 처음이란다.. 

2016년 9월 파리 박람회 준비 그리고 영국 출장 일주일... 한 달 여 내내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파리 메종 오브제 박람회는 1년에 2번 열리는데 이 박람회를 통해 큰 바이어들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회사에서도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상품 준비부터 가격 그리고 바이어들 리스트 등 사전 준비가 무엇보다도 철저해야 했고 그래서 9월 전부터 쉴틈 없이 바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 출장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와서 남은 결혼 준비 리스트를 점검해야 했다. 10월 1일에 한국에서 우리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우스 웨딩이라 또 준비할 것이 엄청났음) 처음부터 끝까지 이래 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남편님은 프랑스 남자라 한글을 1도 모르시기 때문에 모든 결혼식 준비는 내가 마쳐야 했다. 


너무 무리한 탓인가. 감기 기운처럼 으슬으슬하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 한국에 귀국하여 계속되는 두통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게 된 임신 테스트.


임신테스트기는 positive - 헐....몸이 극한의 상태였는데??

한 2주 전 즈음인가 이상한 꿈을 연달아 이틀 동안 꾸었는데, 그것은 바로 가수 싸이(PSY)!!


전반적인 레퍼토리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싸이가 강남스타일 말춤을 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꿈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이것이 예사 일이 아니라고 짐작은 하였으나 이 꿈이 차후 태몽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지금 튼튼이의 행동을 보자면 우리 아들은 역시 태몽에 맞게 가무를 사랑하는 흥부자이다)


그리고 10개월간의 임신(프랑스에서는 9개월이라고 말함) - 누군가 임신 기간 동안이 아기를 기다리며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들, 나에게는 지옥의 입덧으로 시작된 힘든 시간이었다. 거기다 임신 중기에 임신 당뇨까지 겹쳐 당분 그리고 밀가루를 제외한 음식으로만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엄마가 되는 과정 속에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는 새로운 것이었다. 처음으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태동을 느끼고 아기가 배 안에서 커 가는 동안 그때만큼은 감성 또한 충만하여 평소 영화를 보고 잘 울지도 않는 기쁘고 화나고 서럽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보통 10개월 간의 임신기간 동안 단 3번의 초음파 검사만 실시한다. 마지막 초음파에서 튼튼이의 머리 크기가 주수에 비해 크다는 의견이 있었고 임신 당뇨로 아기가 막달에 확 커질 확률이 많기 때문에 예정일 3주 전에 1번의 초음파를 더 했어야 했다. 담당 의사는 아기가 어느 정도 몸집이 있으니 38주 차에 유도분만을 해보자고 제안하였고 나는 그게 사뭇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막달에 무거워진 몸으로 움직임도 힘들고 온 몸에 땀은 차고 밤잠도 설치는 상태라 체력적으로 지쳐있었다. (그 당시에 유도분만이 자연분만으로 이어져 성공하는 데에는 반반 확률이었다는 것만 알았더라도 아마 나는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었을 거다.)


드디어 유도 분만일 - 2017년 5월 18일 목요일 저녁, 예정대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짐도 미리 다 싸 두었고 차를 타고 무사하게 병원에 도착해서 간단한 검사 후 질정제를 삽입하고 그 날 저녁을 나 홀로 병원에서 보냈다. 딱딱한 병원 침대에서 배에다가 자궁 수축을 알아볼 수 있는 기계 그리고 (아기)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기계를 부착하고서 어정쩡한 자세로 잠도 못 자고 꼬박 새벽을 맞이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아침 10시 즈음 간호사는 (유도)촉진제를 투여하겠다고 했다. 촉진제 투여 후 한 3시간 남짓 후에 진통이 걸리기 시작했다. 

초산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보통 유도를 하면 인위적인 진통이 걸리는 경우라 자궁문이 빨리 쉽게 열리지를 않는다. 2센티 정도 자궁문이 열렸을 때 간호사가 무통을 지금 맞을지를 물어보았다. 엥? 한국은 4센티부터라고 들었는데 여기는 바로 원하면 놔줄 수 있단다. 무통주사를 놓는 순간 통증이 감소가 되어 출산까지 시간이 더뎌질 수 있다는 댓글을 읽고 온 터라 일단은 운동을 해보면서 견뎌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2~3시간에 겨우 1센티 정도 열릴 정도로 진행이 더뎠다. 3센티가 되고 무통주사를 맞기로 하고 마취과 의사가 도착했다. 무통주사 바늘을 통해 약이 투여되고 온 다리에 차가운 약기운이 전해진다. 온 다리가 엄청 시리다. 한번 놓으면 2시간 정도 간다는 무통은 웬일인지 두 번째부터는 약빨이 듣질 않아 1분을 간격으로 생진통을 겪어야 했다. 첫째 출산은 파리 내에서도 나름 유명하다는 15구 클리닉에서 했는데 마취과는 실력이 영 꽝인가보다. 난 마지막까지 무통 천국이란 걸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시간마다 계속되는 내진...이틀 꼬박 이렇게 넋이 나가 있는 상태로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굵은 주사 바늘이며 오줌 줄을 꽂은 채로 출산 의자에서 생진 통을 20시간 이상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2017년 5월 20일 새벽이 되어서 제왕 절개 수술이 결정되었다. 너무 오래 진통을 해서 이미 진이 다 빠진 상태였고, 무언가 묵직하게 아래에 낀 느낌이 들었지만 웬일인지 아기가 다 안 내려왔다고 오랜 진통으로 아기에게도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수술을 해서 아기를 빼내는 게 낫겠다는 의견이었다. 출산 중에서도 가장 워스트 케이스 - 그게 바로 나다. 이틀 동안 생진통에 자궁문이 거의 다 열리긴 했지만 결국 수술로 출산하게 된 것이다. 


수술실 가는 길.. 병원 천장 형광등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몸은 지치고 정신은 혼미한데 천장 불이 너무 밝다.

수술실 도착을 하여서 마취제를 투여하고 의사를 기다렸다. 무통이 안 들었던 터라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마취과 의사를 바라봤다. 

"다리 움직여 보세요." 

내가 다리를 움직이자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약에 대한) 저항성이 상당히 강하네요" - 어쩌라고. 

두 간호사가 수술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아주 거슬린다. 갓 교대를 마치고 새벽 조로 들어온 터라 둘이 아주 재잘재잘 할 말이 많다. 익숙한 듯이 수술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준비하고서 다시 수다 삼매경이다. 아하.....

그리고 한 20분 지났나.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의사 선생님 얼굴을 마주했다. 이틀 만에 그분을 두 번째 보는거다.산모들이 막판에 의사 얼굴을 보면 후광이 비친다던데 콜을 몇 번이나 하고도 늦게 오는 그 의사 선생의 머리통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나의 상태를 물어보고 간단히 수술 진행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술 동안 내 옆에는 간호사 인턴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의 걱정 말라는 얘기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다. 아직 얼굴에 솜털이 남아 있는 이 아가씨가 출산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의 복잡한 심경을 알 수나 있을까. 나는 수술 30분 동안 계속 울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한국에서 살아도 될 걸 뭐하러 멀리까지 와서 차가운 수술대에 이렇게 누워있나 싶었다. 유도 분만을 하겠다고 해서 아직 준비도 안된 아가를 억지로 빼내겠다고 한 나 자신을 한없이 미웠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절개 후 온몸이 들썩들썩하는가 싶더니 아기를 꺼내는 느낌이 든다.


 "2017년 5월 20일 새벽 6시 22분 - 아들입니다. 축하드려요" 

아기 얼굴을 스치듯 보여주고 바로 데려갔다. 튼튼이는 오랫동안 골반에 껴있었는지 아님 약기운에 취했는지 태어나서도 한동안 바로 울지 않았다. 수술대 너머로 벌얼건 태반이 보인다.

'아.. 이제 끝인가 보다'


절개할 때 보다 봉합을 할 때가 시간이 갑절은 걸렸다. 남편이 수술실에 들어와서 울었다고 하던데, 감동도 감동이겠지만 탯줄을 자르러 들어와서는 흘린 피를 보고 내가 죽는 게 아닌가 했단다. 그리고 회복실에서 2시간 동안 대기했다. 목이 마르지만 물을 마실 수 없다. 마취가 서서히 풀리는지 하체가 뻐근하다.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와서 젖을 물릴 건지 젖병으로 줄 건지 물어본다. 꼬물꼬물 한 게 배 위에 올려진 느낌이 이상하다.

이틀 동안 너무 씨름을 해서인지 감동보다는 해방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이렇게 엄마가 되었다.



2인실에 도착해서 나보다 이틀 먼저 출산한 다른 산모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잠을 못 잔 표정이 역력했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출산한 엄마들 만이 아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병원은 갓 신축한 건물이라 모든 시설이 깨끗했다. 이제 퇴원 5일 전까지 밤낮으로 아기와 함께 붙어 지내야 한다. (프랑스는 병원에서는 간호원 분들이 아기를 따로 맡아 관리하지 않고 모자동실 형태로만 되어 있다) 


모든 게 처음이다. 재채기 그리고 딸꾹질 귀여운 방귀마저.  

밤낮으로 울어대는 신생아가 보내는 신호를 내가 알리 없다. 그냥 무조건 기저귀부터 갈리고 젖을 물려보는 게 다인 거다. 

'너도 세상이 처음이지만 나도 엄마가 처음이란다.' 

수술을 했기 때문에 아랫배가 찢어질 거 같지만 아기가 울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수유 쿠션을 이리저리 뭉개 봐도 아기나 나나 불편한 자세만 나올 뿐이다. 옆에 산모가 아기와 자고 있는데 튼튼이가 빼에빼에 울어대면 진땀이 절로 난다. 


프랑스에서는 산부인과 병동에서 총 3명의 다른 의료인을 볼 수 있다. 사쥐팜 (Sage femme : 조산사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사실 프랑스에서 사쥐팜은 출산/산모 케어 그리고 아기에 관한 전반적인 영역을 담당한다) 그리고 l'auxiliere de puericulture 는 어시스트 격인데 보통 아기 건강이나 발달 상황을 체크해 준다. 마지막으로 소아과 의사 이렇게 3 부류이다. 사쥐팜과 다른 의료인이 번갈아 병실을 방문하기 때문에 낮동안에는 사실상 거의 쉴 시간이 없다. 그리고 수술을 맡아주었던 의사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꼴로 방문하여 산모 상태를 체크한다. 

프랑스어가 어설픈데 아기와 나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라 어떻게든 알아들어야 한다.  


옆에 있던 산모는 자연분만이라 이틀 정도 더 있다가 퇴원을 했다. 그리고 쭉 혼자 있는 시간 

병원에서의 하루 낮이 길다. 

잠은 모자란데 생각은 많다. 

창 밖을 바라보니 놀이터에서 흑인 보모와 금발 아이 둘이 보인다. 두 살 또래인 거 같은데 엄마 아빠는 일을 가고 아이들은 보모한테 맡긴 모양이다. 갑자기 너무 공허해진다. 우리 아기도 내가 직장을 나가게 되면 다른 사람 손에 크겠구나....

밤에 수유를 마치고 새근새근 자는 아기를 보고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이 모든 게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기쁘지만 행복한 거 같진 않다. 아기가 나는 같은 방에 있지만 나는 멀찍이 자는 아기를 바라볼 뿐이다. 

내게 스멀스멀 우울증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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