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억으로
2년 정도 키운 뱅갈고무 나무가 키도 자라고 가지도 뻗고 하여 화분이 좀 작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화분의 크기를 좀 키워줘야 할까? 뿌리도 많이 자랐을 테니 숨을 좀 쉴 수 있게 해줘야겠다.' 하여 분갈이하기 위해 나무를 뽑았는데 세상에나! 키만 자라고 뿌리는 아주 가느다란 실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진짜야? 이럴 수도 있구나! 조금 더 큰 화분에 조심히 옮겨 심고 뿌리가 다치지 않고 예쁘게 잘 자라주기를 바랐습니다.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9살 때였습니다. 10년을 껑충 뛰어넘어 19살 된 아이한테 하듯 했습니다. 줄곧 했던 말은 "정신 줄잡아라." "정신 안 차릴래?" "혼자 그것도 못해?" "이제 혼자 할 때도 됐잖아?" 늘 퍼붓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1학기 끝나갈 무렵 2학년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어머니, 별이가 다 잘 하는데 친구들하고 관계가 좋지 않아서요.. 친구들이 별이를 무서워해요.. 친구들이 뭐 물어보면 싸 붙이고 표현도 강하게 하는데요.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학년이 올라가면 교우 관계가 힘들어질 수도 있어요. 혹시, 상담을 좀 받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 상담이요?" "네.. 학교 위클래스도 있어서 도움받아도 좋을 것 같아요.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곳이 필요한 것 같아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뚜뚜..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굴리고 굴려도 상담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은 반쯤 나간 상태에서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습니다. 가만가만 아이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려보니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원인은 아이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엄마의 행동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키만 컸지 감정도 마음도 모두 실뿌리처럼 약했던 것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말과 행동이 따로였었구나!" 아직 어린 거였어. 이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엄마가 감정을 다뤄주지 않고 이성적으로만 아이를 대했기 때문에 아이는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운 별이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네 잘 못이 아니었어." "엄마 잘 못이었어."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고 네가 어리다는 것을 잊어버렸었어. 미안해.." "응, 엄마. 몰랐었어.." 별이는 잠겨있던 수도꼭지가 갑자기 세게 튼 것처럼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린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 울음 속에는 속상함, 미안함, 서러움, 안쓰러움, 고마운 감정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이제 알려줘. 그래야 내가 알지" "그래, 알려줄게.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그치?" "응."
원인을 알고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별이 엄마예요." "네, 안녕하세요." "생각해 보니 제가 문제였어요. 아이는 몰라서 못 한 거였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노력해 보겠습니다." "네, 어머니. 별이는 어머니를 만나 참 다행이에요." 통화가 끊나고 제가 할 일은 아이를 아이로 바라보는 거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9년밖에 안 된 아이로요. 학원 끝나고 신호등 앞에서 가방을 흔들 흔들 거리며 신호를 기다리는 별이를 건너편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정말 어린아이였습니다.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런 제가 낯설었습니다. 낯섬을 낯섬으로 끌고 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노력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말이지요. 하루하루 사랑이 스며들기를 바라며 사랑을 먹여주도록 했습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인정"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잘 받아먹었는지도 모르게 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학일이 되었습니다.
개학 후 2주일이 지나자 담임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방학 동안 어머니의 노력으로 별 이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친구들이 많이 변했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래요?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같은 분을 학부모로 만나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또, 별이에게 좋은 어머니세요." "선생님, 앞으로도 언제든 문제가 있을 시 바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